인류는 근본적으로 생명 진화의 예정된 결과가 아닐 것이라고 굴드는 말한다. 인류가 이룬 영광과 성취가 아무리 눈부시다 하더라도 인류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 사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가수 송창식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플라밍고의 미소〉를 읽었다고 했다. 2015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최근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놀랐다. 송창식이 과학책을 읽는구나. 송창식은 미국 하버드대 고생물학자인 저자가 책을 “참 잘 썼다”고 했다.
<플라밍고의 미소〉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풀하우스〉보다는 덜 알려졌고, 추천 도서에 포함될 정도는 아니다. 송창식이 이 책을 보다니, 그의 과학책 독서 내공이 상당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굴드 책 중에서 많이 읽히는 게 〈풀하우스〉, 〈다윈 이후〉다.
<풀하우스〉는 단일 메시지가 책 전체에 흐른다. “진화(evolution)는 진보(progress)가 아니라 다양성(diversity)의 증가다.” 진화란 단순함에서 복잡함을 향해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옆으로 많은 잔가지를 치는 것이다. 굴드는 “진화란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뻗어 있는 고속도로나 하나의 꼭대기를 가진 사다리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무성한 가지를 가진 나무”라고도 말한다.
굴드는 “생명 역사는 진보라는 주장이 기만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서”라고 집필 목적에 대해 말한다. 생물학자도 진화란 단순한 생명체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바뀌는 과정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다윈의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을 압도하는 종(種) 수없이 많아
스티븐 제이 굴드가 뒤집으려는 게 인간중심주의 사고다. 그는 “생명 전체를 하나로 보는 시각을 가지면 인간을 진화의 정점에 둘 수 없게 된다”고 하는데, 이 문장에서 ‘생명 전체’라는 단어를 달리 표현하면 책 제목 ‘풀하우스’다. 생명계란 큰 집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은 복잡한 생명체에 속하며, 복잡한 생명체란 풀하우스 내에서 예외적인 ‘변이’에 지나지 않는다. 수와 종류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종(種)은 수없이 많다.
굴드는 말한다. “인류는 스스로를 몹시 사랑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 전체를 대표하는 생물도, 가장 상징적인 생물도 아니다. 인간은 동물 종의 약 80%를 차지하는 곤충류의 대표도 아니고, 특수하거나 전형적인 생명체의 본보기도 아니다.”
무슨 얘기야, 그래도 인간이 대단하잖아? 지구 생태계를 완전히 바꿀 수 있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지구를 날려버릴 수 있는 핵무기도 손에 쥐고 있고. 그런 생물이 지구에 인간 말고 또 어딨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박테리아가 비웃는단다.
“박테리아는 어떤 기준에 비추어보아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지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물이다.”
굴드는 박테리아가 우월한 증거를 몇 가지 말한다. 살아온 시간과 영원불멸성, 다양성, 편재성에서 압도적이다. 화석 기록은 생명이 35억~36억 년 전 박테리아에서 시작했다는 걸 보여준다. 박테리아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진핵생물이 등장한 건 생명 역사가 절반이나 지나서였다. 최초의 다세포 동물이 등장한 건 5억 8000만 년 전쯤이다.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생명의 최빈값이다. 굴드는 “수적으로나 다양성으로나 박테리아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굴드는 핵무기는 인류를 자멸로 이끌 수 있고, 대형 척추동물 수천 종도 인류와 함께 저승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테리아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박테리아의 다양성은 놀라운 걸로 드러났다. 유전자 염기 서열 분석이 우리에게 그걸 알려줬다. 이에 따라 생명의 계통수 모양이 달라졌다. 전에는 생명 계통수가 식물, 동물, 균류란 세 줄기를 가졌다. 이제는 박테리아가 두 줄기(박테리아, 고세균)를 차지한다. 나머지 한 가지에 식물, 동물 등 진핵생물로 분류되는 모든 것이 구겨져 들어간다. 박테리아의 다양성은 이렇게도 볼 수 있다. 메탄가스를 생산하는 메타노겐, 높은 농도의 염분에 내성을 가진 호염성 박테리아, 끓는 물에서도 생존하는 호열성 박테리아…. 심지어 4억 년 된 퇴적물 속에서 잠자고 있던 박테리아도 있고, 깊이 6킬로미터 땅속에서도 박테리아가 나왔다. 그들의 수, 그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흙 한 숟가락에 박테리아 1조 마리가 들어 있다.
45억 년의 지구 역사가 다시 시작한다면
굴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중피종을 진단받았다. 주치의가 병에 관해 말을 잘 안 해 줘 굴드는 직접 관련 정보를 찾았다. 문헌에는 “중피종은 진단 후 중간값 생존율이 8개월 이하”라고 쓰여 있었다. ‘중간값 생존율이 8개월 이하’라는 말은 발병자 중 절반은 8개월이 안 되어 죽는다는 말이다. 굴드는 “그 문헌들에 빠져 8개월 후 죽는다는 결론을 내렸더라면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없었을 거다. 나는 통계학 교육과 자연사에 관한 지식 덕분에 올바른 분석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평균이라는 것은 조심해야 하며, 그것은 개체에는 적용될 수 없는 추상적인 숫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굴드는 “중심 경향성은 추상적인 것이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변이”라고 말한다. 그는 ‘변이’에 관해 숙고한 끝에 중피종 사망자 분포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즉 진단 후 경과 시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는지를 그리면 곡선 그래프가 된다. 이 곡선의 오른쪽 끝이 왼쪽 끝보다 길게 뻗어 있고, 이는 일부 환자가 8개월보다 훨씬 오래 산다는 것을 뜻한다. “곡선의 오른쪽 반은 이론적으로 하면 최고 연령까지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 굴드는 자신이 아직 젊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현대 의학에서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도시에 살고, 운 좋게도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암이 발견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중피종 환자 사망 곡선에서 변이의 형태가 크게 오른쪽으로 기운 꼬리 쪽에 속한다고 자신했다. 지식에서 구원을 찾은 그는 결국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야구 4할 타자가 미국 프로야구에서 사라진 걸 얘기하기 위해 굴드가 자신의 중피종 발병을 길게 얘기한 건, 독자가 통계 지식에 좀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4할 타자는 타자들의 타율 곡선에서 오른쪽 끝 꼬리에 해당한다. 왼쪽 끝에는 타율이 저조한 하위타자들이 속해 있다. 가운데에는 평균타율에 가까운 타자가 몰려 있고, 숫자가 많은 만큼 가운데가 불룩 올라간 종 모양이 된다. 그런데 종형 곡선의 오른쪽 끝에 있던 4할 타자가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사라졌다. 이 이유를 갖고 타자 수준이 떨어졌다는 등 온갖 이야기가 많았다. ‘요즘 애들 우리만 못해’, ‘깡이 없어!’, ‘노력을 안 해’와 같은 식이다.
굴드는 “4할 타자가 사라진 건은 오히려 프로야구 경기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을 의미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펼친다. 평균 타율이 2할 6푼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야구 수준이 향상되면 평균 타율을 가진 타자가 늘어나고 종형 곡선상의 양쪽 끝 ‘변이’가 감소한다. 곡선의 가운데, 즉 평균값에는 사람이 몰려 곡선의 형태가 종전보다 뾰족해진다. 이 변이 감소가 바로 4할 타자의 소멸을 의미한다.
지구 역사가 45억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진화 결과 인간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굴드는 “인류는 근본적으로 생명 진화의 예정된 결과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가 이룬 영광과 성취가 아무리 눈부시다 하더라도, 인류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화 결과 인류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공룡도 다시 등장해야 하고, 삼엽충도 만들어져야 하고, 1681년을 마지막으로 멸종한 도도새도 재등장하고, 비슷한 시기 뉴질랜드에서 유럽인이 씨를 말린 모아 새도 마찬가지다.
최준석 | 주간조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