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우리나라 문묘는 서울 성균관대 안에 있는 성균관 대성전에 있다. 그곳에는 4대 성인(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자공, 자로를 비롯한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명, 정호와 주자 등 송나라의 대표적 유학자 6명과 함께 우리 유학자 18명의 위패도 있다. 이른바 ‘동국 18현’ 또는 ‘동방 18현’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지성들이다.
‘동국 18현’이 누구인지, 어떤 학문적 업적이 있는지, 성균관에 그들의 위패가 왜 모셔져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벼슬과 출세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해 역사책에서조차 흘려버리는 당대 석학들도 있다. 그래서 더 유명하고 뛰어난 학자들도 많은데 어떻게 이런 인물이 들어가 있지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 선택한 ‘18현’은 권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문이 좋다고, 벼슬이 높다고 자격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한다. 그래서 “정승 10명이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의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옛말도 있는 것이다.
‘동국 18현’은 조선시대에 주로 왕들이 정했다. 그렇다고 모두 조선의 유학자들은 아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는 14명이다. 선조들은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뛰어난 학자들에게도 ‘현인(賢人)’이란 칭호를 붙이고,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본받았다. 신라 2현인 설총과 최치원, 고려 2현인 안유(안향)와 정몽주가 그 주인공들이다. 조선에서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가 현인이 됐다. 이들 중 특히 학문적 도량이 깊은 이황, 조광조, 이언적, 정여창, 김굉필을 ‘동방의 5현’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느냐, 유명하냐가 아니다. 모두 나름대로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세계를 구축했으며, 학자와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다.
18현 중에는 화려한 삶보다는 불우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 사화나 정변에 휘말려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거나,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만 전념해 존재와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저서, 기록들도 소개가 적고 많이 읽히지 않았다. 이들의 사상과 학문의 세계를 알고, 삶을 들여다보고 본받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길이다. 이들이 이순신처럼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영웅’은 아닐지 모르지만, 물질문명과 이기주의로 물든 이 시대 우리의 삶에 소중한 정신적 좌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조가 문묘에 배향해 ‘동국 18현’이 된 16세기의 큰 선비 하서 김인후(1510~1560)도 그런 인물이다. 이황과 더불어 당대 성리학계를 이끌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성리학을 배웠고 천문 지리, 의학, 산수에도 능통했다. 문장에도 뛰어나 그가 남긴 1600여 편의 한시는 당·송시대 명시들과 견줄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문만큼이나 효와 충, 지조와 절개도 강해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주장하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려 했다.
백승종 과학기술교육대 교수는 저서 <조선의 아버지들>에서 역시 ‘동국 18현’인 송시열이 김인후의 학문과 삶에 관해 언급한 것을 소개했다. “이 나라의 큰 선비들은 도학, 절의, 문장에서 저마다 등급의 차이가 있었다. 이 셋을 다 지니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아끼시어 하서 김 선생을 내셨도다. 그분만이 이 셋을 모두 갖추셨다”고.?기대승도 원래는 김인후와 성리학에 관해 토론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인후가 일찍 죽는 바람에 이황과 그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고 한다.
부자(父子)가 18현에 나란히 들어간 경우는 김장생(1548~1631)과 김집(1574~1656)이 유일하다. 이이의 제자인 아버지 김장생은 조선의 예학을 세웠으며 문하에 송시열을 두었다. 그의 예학은 임금이든 신하든 백성이든 같아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무너진 정치와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는 실천학문이었다.
아버지의 예학을 가장 잘 계승, 발전시킨 사람은 아들 김집이었다. 김집은 아버지를 도와 당시 선비들의 필독서가 된 <의례문해>, <상례비요> 편찬에 정성을 다했다. 이를 포함한 김장생의 전서 9권은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다. 이를 읽어보면, 후손들이 내용이 아닌 형식에 집착한 허례허식으로 그의 예학을 얼마나 변질시켰는지 알 수 있다.
조헌(1544~1592)은 우리에게 의병장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럴 만하다. 1591년 왜국 사신이 오자 그는 옥천에서 상경해 그들의 처단을 상고하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력 강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700여 명을 규합해 승병들과 함께 청주를 수복했으며, 관군의 방해로 의병 대부분이 해산했지만 개의치 않고 의병 700명과 금산 전투에 참가해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병장이기에 앞서 그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고 발전시킨 강직한 학자이자 관리였다. 선조가 절에 향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 교서관 정자 직을 박탈당하는가 하면, 통진 현감으로 있을 때는 죄인을 엄중히 다스려 탄핵을 받고 유배되기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주 제독관으로 있을 때는 실권을 잡은 동인이 이이, 성혼에게 죄를 추궁하려 하자 반대 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동국 18현’의 맨 끝자리를 차지한, 이름조차 낯선 박세채(1631~1695) 역시 노론의 거두 송시열과 교류할 만큼 학문이 높은 선비였다. 성리학에 대한 그의 다양성과 깊이는 <범학전편>, <시경요의>, <춘추보편>, <남계독서기>, <대학보유변>, <심경요해>, <학법총설>, <육례의집>, <삼례의>, <양명학변> 등의 방대한 저서와 70여 건의 문집이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학문과 정신세계를 이룩한 선조들을 잘 모르고 있거나, 무관심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제대로 번역조차 하지 않아 그들이 남긴 저서들을 온전히 만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확인하고 되새기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신문화를 올곧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조광조 영정, 이황 표준영정, 송시열 초상 ⓒ현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