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골프는 흔히 ‘화수분’에 비유된다. 화수분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하는데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뜻한다. 한국 여자골프는 올해 현역 은퇴를 선언한 박세리가 199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메이저 대회 2승을 포함해 4승을 휩쓸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래 세계 정상급 골퍼를 계속 배출해왔다. 올해도 우리 여자골퍼들은 수많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세 선수를 꼽자면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박인비(28·KB금융그룹), 올해 LPGA 투어에서 신인상과 베어트로피(최저타수상)를 수상한 전인지(22·하이트진로), 그리고 국내 무대를 완전히 평정한 뒤 내년 미국 무대 진출을 선언한 박성현(23·넵스)을 들 수 있다. 키워드로 세 선수의 올 시즌 활약을 살펴봤다.
박인비의 용기
리우올림픽 금메달 기적 쐈다
올해 리우올림픽에서 한국을 빛낸 최고 스타는 두말할 것 없이 박인비였다. 당초 출전조차 불투명했던 박인비는 1900년 파리 대회 이후 116년 만에 다시 올림픽에 복귀한 여자골프의 첫 챔피언이 되는 기적을 쐈다. 이미 4대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데 이어 올림픽 금메달까지 더하면서 ‘골든슬램’이라는 신조어의 주인공이 됐다. 2라운드에서 단독 선두에 나선 이후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고 금메달을 따내는 완벽한 레이스를 펼쳤지만 그는 올림픽이 열리기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출전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왼쪽 엄지손가락을 다쳐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벌어졌던 US여자오픈과 브리티시오픈 등 메이저 대회 두 개를 연달아 불참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또 부상이 호전됐다고 해도 무리하게 올림픽에 출전해 부진할 경우 ‘출전 자격을 갖춘 후배의 기회를 막았다’는 비난을 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순간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린 박인비. ⓒ뉴스1
하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결과에 상관없이 도전하겠다는 정신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라고 할 수 있다. 박인비는 금메달을 따낸 뒤 "(출전을) 결정하고도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수없이 나 자신을 다독였고 그러면서 나 자신이 성장한 것 같다. 출전 자격을 갖췄는데 ‘욕먹을 수 있으니까 안 나간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봤다. 올림픽에 가게 된 용기와 금메달을 딴 것,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나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웃었다.
박인비는 내년 시즌 투어 복귀를 목표로 재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며 메이저 등을 중심으로 15개 정도의 대회에만 집중해 출전할 계획이다. 올해 LPGA 명예의 전당에 가입한 그의 행보는 여전히 거침이 없다.
전인지의 집념
LPGA 첫 시즌 신인상과 최저타수상
전인지는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골퍼로 손꼽힌다. 갤러리를 향한 세련된 매너, 침착하고 교과서적인 정확한 샷, 큰 경기에 강한 두둑한 뱃심 등이 인기요인이다. ‘플라잉 덤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그는 국내 투어 시절에는 구름관중을 몰고 다니는 스타였다. 올해 LPGA 투어에 정식으로 데뷔했고 첫 시즌에 신인왕과 최저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데뷔 시즌에 이 두 가지 상을 받은 것은 1978년 낸시 로페즈(미국) 이후 사상 두 번째다.
▶ LPGA 투어에서 베어트로피(최저 타수상)를 받은 전인지. ⓒ뉴스1
전인지의 집중력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는 올 시즌 마지막 대회인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였다. 일찌감치 신인왕을 확정한 전인지는 최저타수상을 놓고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와 마지막 순간까지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쳤다. 전날까지 11언더파로 공동 4위가 되면서 공교롭게도 같은 조로 최종 라운드를 시작한 두 선수는 16번 홀(파3)까지 리디아 고가 1타 차로 앞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17번 홀(파5)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1~3라운드 내내 이 홀에서 버디를 잡았던 리디아 고가 갑자기 샷이 흔들리면서 보기를 범한 반면 전인지는 16번 홀에 이어 17번 홀에서도 버디를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18번 홀(파4)에서 두 번째 샷을 홀 3m에 붙인 뒤 버디를 낚아 파에 그친 리디아 고를 제쳤다. 올 시즌 평균타수 1, 2위 순위가 마지막 순간에 뒤바뀐 것이다. 전인지의 시즌 평균타수는 69.583타로 리디아 고(69.596타)에 불과 0.013타로 앞섰다. 전인지의 집념과 큰 승부에 강한 멘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전인지는 성공적인 시즌을 마친 소감으로 "아쉬운 성적이 나올 때도 진심으로 같이 응원해준 동료들과 팬들이 있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 TV에서만 보던 선수들과 함께 경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꿈이 조금씩 실현되는 느낌이었다. 안주하지 않고 레전드급 선수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박성현의 도전
국내 무대 완전히 평정, 미국으로 진출
올 시즌 국내 무대를 완전히 평정한 박성현의 별명은 ‘남달라’ 또는 ‘대세’였다. 별명만 봐도 그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국내 무대를 장악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7승을 올리며 상금왕과 다승왕, 평균타수 1위를 석권했다. 이 같은 성적은 그가 국내 무대에만 집중하지 않고 간간이 LPGA 투어를 뛰면서 거둔 것이기에 더욱 놀랍기만 하다. 더욱이 올해 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과 에비앙챔피언십에서 각각 3위와 2위에 오르며 충분히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특유의 장타력과 정교한 아이언샷에 더해 최근에는 퍼팅까지 좋아지면서 ‘무결점 선수’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평이다.
▶ 국내 무대를 평정한 박성현은 내년 LPGA 진출을 선언했다. ⓒ뉴스1
박성현은 내년 시즌 미국 무대 진출을 선언했다. 예상보다 일찍 미국 진출을 선택한 것은 그가 유력 마케팅회사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LPGA 투어에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이 회사는 박성현을 위한 전담팀을 구성해 내년 시즌 개막에 맞춰 총력 지원할 계획이다.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캐디, 영어 강사, 코치 등 4명으로 구성된 전담팀이 박성현과 함께 시즌 준비에 돌입했다. 박성현의 공식 데뷔전은 내년 1월 18일에 열리는 시즌 개막전 바하마클래식으로 예정돼 있다. 박성현은 "어릴 때 세운 목표인 LPGA 진출을 결정했다.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일단 1승을 목표로 한 발짝씩 나아가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박성현은 올해 미국에서 거둔 성적에 걸맞게 내년 시즌 전인지의 뒤를 이을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평가된다. 특히 미국이 한국보다 페어웨이가 넓어 장타자인 그의 장점이 크게 발휘될 것으로 예상된다.
글· 위원석(스포츠서울 체육1부장) 2016.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