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게임회사로 이직한 김영권(32세·가명) 씨는 이전 직장에 비해 자유롭고 수평적인 직장 문화에 적응하는 중이다. 특히나 놀라웠던 건식사비 계산 문화. 새로 입사한 후 팀원들과 함께 먹는 첫 점심 식사 자리였다. 회사 근처 일식집에서 8명이 먹은 밥값은 총 7만5000원이 나왔다. 팀장이 자연스레 계산대 앞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으레 법인카드로 계산을 하거나 그가 한턱 내는 걸로 생각하던 찰나 들려온 소리. "각자 자기가 먹은 음식값만큼 입금해. 내 계좌는 다들 알지? 영권 씨는 첫날이니까 빼고." 김 씨는 구내식당에서 먹는 게 아니라면 팀장이나 가장 높은 직급의 선배가 계산하는 게 당연시되던 이전 직장과는다른 분위기에 다소 당황했다. 하지만 이 회사 건물엔 구내식당이 없어 점심값 지출이 큰 데다, 매번 얻어먹는 것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싸진 점심값 탓에 ‘쏘는’ 문화 사라져
계산대 앞에 줄지어 "각자 계산해주세요"
각자 계산하는 이른바 ‘더치페이(각자내기)’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 낮거나 조직 문화가 유연한 직장에서는 밥값 더치페이는 이미 보편화된 모습이다. 올해 초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도 ‘점심값 계산을 더치페이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6명꼴로 나타났다. 반면 직장상사가 직접 내는 경우는 열에 한명이 안 됐다(마이크로밀엠브레인). 점심시간 카드 결제 한 건당 액수도 지난해보다 줄었다. 중식2.4%, 한식 3.7%, 양식 5%, 일식 6% 순으로 줄어든 비율이 컸다(BC카드 빅데이터 센터). 계산을 각자 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트렌드연구소 박성희 연구원은 "불황이 일상화된 뉴노멀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더치페이는 너무나 당연한 문화"라고 분석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저축(Stock)을 할 수 없는 플로(Flow) 세대다. 우리나라는 함께 식사를 하는 게 보편적 문화지만 얇아진 지갑 탓에 한 턱을 내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혼자 식생활을즐기는 ‘혼술족’, ‘혼밥족’도 이런 배경으로등장한 것이다."
▶청탁금지법 등으로 밥값을 각자 내는 ‘더치페이’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뉴시스
여기에 비싸진 점심값도 더치페이를 부추겼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점심값은 처음으로 6000원을 돌파(6566원)했다. 경기 성남시 판교에서 근무하는 30대 직장인 정승원 씨는 "점심 한 끼 식사 가격이 9000원정도 하는데 서너 명이 함께 식사를 한 뒤 한 명이 이걸 다 결제하는 건 부담일 수밖에 없다. 재미삼아 사다리타기나 제비뽑기로 계산할 사람을 정하는 게임도 요샌 자제하는 편이다"라고 털어놓았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회사가 있는 20대 직장인 이영은 씨는 "한 명이 부담하면 메뉴를 마음대로 고르기도 힘들다"면서 "우리 회사는 팀별로 미리 한 달 치 점심값을 걷어 디포짓(예치)해놓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 사이에선 더욱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대학생 안지현(22) 씨는 "여럿이 만나는 자리에 현금을 안 가져오는 친구는 예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금을 걷어 계산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 씨는 이어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문화가 남아 있긴 하지만, 모두 수입이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 더치페이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더치페이는 이른바 한 명이 ‘쏘는’ 것에 비해 계산이 복잡할 수 있지만, 이들은 다소 번거로운 방식에도 불편함이나 창피함을 느끼지 않는다. 현금 사용이 적은 젊은이들은 앞서 직장인 김 씨의 사례처럼 한명이 계산한 뒤 계좌로 송금을 하거나, 각자의 카드로 자신의 몫만 계산하기도 한다. 한 명이 여러 명의 카드를 걷어 종업원에게 내미는 경우도 있지만, 각자 먹은 음식값이 다를 땐 모두가 계산대 앞에 줄을 서는 장관도 펼쳐진다. 대학생 김민우(27) 씨는 "인원이 많을수록 더치페이를 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계산대 앞에 대여섯이 줄을 서 ‘각자 카드로 계산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지만 이젠 이마저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변화에 음식점도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계산 업무가 이전에 비해 두세 배 이상 많아지면서 계산만 하는 종업원을 고용하기도 한다. 일본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문 자판기를 들여놓는 곳도 있다. 계산 업무가 늘면 그만큼 실수할 확률도 커지기 때문이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중·장년층 인식도 변화
더치페이 계산·간편 송금 스마트폰 앱 인기
지난 9월 28일 시행에 들어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청탁금지법)은 중·장년층이나 영업과 접대가 일상화된 업계 종사자들에게까지 더치페이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법 적용 대상자는 직무 관련성이 없는 경우 3만 원 이하의 식사만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각자 내는 게 깔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 법자체가 ‘더치페이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50대 공무원 정은태(가명) 씨는 아직은 어색하지만 긍정적인 반응이다. "며칠 전 동창회에서 한 친구가 자리에 공무원도 있고 하니 더치페이를 해보자며 농담 삼아 말했다. 쩨쩨하다며 본인이 내겠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요즘 젊은 애들은 다 이렇게 한다 해서 해봤다. 더치페이가 세련되고 합리적인 문화라는 인식이 생긴 듯하다."
▶더치페이를 위한 스마트폰 앱도 인기를 끌고 있다. ‘더치페이 종결자’는 음식값 계산은 물론 누가 자기 몫을 안 냈는지까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누리집
앞서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첫날 전국 19세 이상 성인 528명을 대상으로 더치페이 문화 확산 여부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0.7%가 ‘확산될 것’이라고 답해 ‘우리 문화에서는 잘안될 것’이라는 응답(35.9%)을 크게 앞섰다(리얼미터).
이처럼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더치페이를 도와주는 스마트폰 앱 등 새로운 기술도 등장하고 있다. 더치페이 앱은 모임 인원, 차수와 식사금액을 입력하면 이를 n분의 1로 나누어 문자메시지 등으로 알려준다. 미납자에게는 ‘더치페이 재요청하기’ 기능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은행권에서는 기존 모바일 앱에 더치페이 기능과 송금 서비스를 연계한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미리 계좌번호만 입력해놓으면 암호 입력만으로도 별도의 인증 절차 없이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다. 받는 사람은 앱을 설치하지 않아도 문자메시지로 입금된 돈을 알 수 있다. 한 은행의 경우 "더치페이 앱의 하루 평균 가입자 수가 4000명 수준에서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6000명 수준으로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결제 전문 기업들은 식당에 설치하는 전자메뉴판에 더치페이 결제 기능을 탑재했다. 한 기업이 개발한 전자메뉴판은 주문부터 결제까지 앉은 자리에서 태블릿PC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기업은 여기에 더치페이 기능을 추가해 음식을 주문하면 한사람당 밥값을 계산해주고 여러 명이 나눠 낼 수 있는 기능까지 담았다.
박 연구원은 우리나라도 이미 20, 30년 전부터 더치페이가 일상화한 일본과 같은 모습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법은 트렌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청탁금지법으로 더치페이가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에도 같은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회전반에 변화가 있을 거다. 더치페이는 서로 부담 갖지 않고 식사할 수 있는 좋은 문화다."
글· 조영실(위클리 공감 기자) 201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