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이스마엘’로 시작되는 허먼 멜빌의 장편 해양소설 〈모비 딕(Moby Dick)〉에는 극단적인 두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의 다리를 집어삼킨 흰고래 모비 딕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에이하브 선장과 그를 견제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인 일등항해사 스타벅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스타벅도 선장이 고래에게 당하자 결국 이성을 잃고 그토록 증오하던 에이하브를 닮아가다가 그에 이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스타벅스 커피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모비 딕〉에 등장하는 일등항해사의 이름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따왔다고 밝혔다. 스타벅스 찻잔의 로고는 다름 아닌 이 소설에 등장하는 포경선의 고물에 새겨진 요정 세이렌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타벅스 커피는 공정무역 인증(Fair Trade Certified) 커피 원두를 많이 사용한다.
공정무역 인증제도는 가난한 국가의 빈농이 재배한 농산물을 산지 시세보다 20% 정도 웃돈을 주고 구매하는 대신 농민에게 ‘자녀 학교 보내기’, ‘친환경 농법’ 등을 요구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스타벅스, 던킨도너츠, 월마트, 샘스클럽 등 미국 대기업들은 인증 마크를 받은 농산물을 시세보다 비싸게 구입한다.
미국 카펫 가게에서는 인도나 파키스탄, 중국산 양탄자 뒷면에 ‘러그마크재단’이라는 작은 딱지가 부착된 카펫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작은 스티커는 양탄자를 만들기 위해 어린이들의 고사리손을 빌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어린이 노동 착취가 세계적인 비난 대상이 되자 미국 정부와 관련 단체들이 나서서 제정한 일종의 검증 마크로, 굳이 말하자면 선진국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보호조치인 셈이다.
나이키도 동남아시아 현지 공장에서 어린이 노동력 착취가 문제가 돼 나이키 불매 운동이 벌어지자 이들 어린이를 모두 내보냈다. 그뿐 아니라 해마다 거금을 들여 수많은 인권단체 관계자들을 현지 공장으로 초청해 어린이 노동자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스타벅스나 던킨도너츠, 나이키의 이 같은 조치는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 실제로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에는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어린이가 수두룩하다. 이들은 화장실에 가는 일조차 눈치를 봐야 하고 하루 12시간 일해도 1달러는커녕 30∼40센트 받는 게 전부다. 열 살만 되면 골병이 들어 온몸이 굳어지는 산업병까지 등장하고 있다. 현대판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인 셈이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같은 조치는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주장한다. 절대 빈국 어린이들은 하루 1달러라도 받고 일해야 끼니를 유지할 수 있고, 이들 기업이 어린이 인권 운운하며 노동을 금지하면 곧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된다.
커피 재배 빈농에게 어린이들을 학교에 보내라며 웃돈을 쳐준다지만,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다는 건 해당 기업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들의 얄팍한 마케팅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며 냉소적인 눈길을 보낸다.
그럼에도 이 같은 기업들의 태도 변화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선 상당히 고무적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거대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활동은 지금과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일말의 희망을 주고 있다. 실제로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우리의 경우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어려움이 많다.
인류 보편의 가치는 인권이다. 인간은 당연히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를 마시다가도 이 한잔의 커피가 제3세계 사람들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감미롭기까지 하다.
글 ·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언론학·매체경영)) 201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