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한국 양궁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양궁 국가대표 되는 것이 올림픽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라는 말처럼 태극 마크를 위한 여정은 치열하고 험난하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개인당 4055여 발의 활을 쏘고, 과녁에 꽂힌 화살 점수를 확인하기 위해 182km의 거리를 오간다(과녁까지 왕복 140m×1300회). 매일 똑같이 300~400발의 활을 쏘는데 한 번도 같은 날이 없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활로 쏘는데도 결과는 전혀 같지 않다. 그래서 반복된 훈련을 통해 좋았던 느낌을 찾고, 그중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느낌을 찾기 위해 더 많은 활을 쏜다. 그 미세한 차이를 찾는 것이 양궁의 매력이다. 선수들은 수많은 선발전을 거치며 그 과정에서 터득한 컨트롤 방법을 몸에 차곡히 쌓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활을 당기고 손에서 놓았을 때 10점인지 9점인지 과녁의 점수가 예상되기도 한다.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양궁 리커브 여자 단체 결승전 경기를 하는 장혜진 선수. 한국 여자 양궁은 대만을 세트 승점 5-3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선DB
나는 활을 쏠 때 느껴지는 긴장감과 짜릿함을 사랑한다. 낚시하듯 손으로 전해지는 손맛도 있다. 금메달리스트로 불리지만 나는 활을 잘 쏘던 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활 못 쏘는 선수’에 가까웠다. 실제로 2009년에 국가대표 8명을 뽑는데 9등을 했고, 2012 런던올림픽에도 3명의 선발선수를 뽑는데 4등을 했다. 하지만 런던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었기에 스스로 돌아보면서 부족했던 것들을 채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돌아봐도 당시의 나는 올림픽에 나갈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도 실패의 시간들이 준 선물이다.
양궁과 인생은 닮아 있다. 누구나 10점 만점을 조준하지만 외부 요인과 마음 상태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선수들도 언제나 과녁을 향해 정조준하지는 않는다. 비의 세기나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일부러 오조준(誤照準)을 할 때도 있다. 초속 5m의 바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불 때 화살을 오른쪽으로 돌려 8점 위치를 겨냥하고, 맞바람이 불 때는 조준점을 위로 향하게 하는 식이다. 사나운 듯해도 길을 내주는 바람이 있고, 평온해 보여도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있다. 그런 바람의 결까지 읽어 과녁을 비켜 맞히는 것이 오조준의 기술이다. 단순하게 과녁에 집착해선 적중이 어렵다. 물론 심리 상태도 중요하다. 경기를 하다 보면 욕심이 생겨서 10점을 쏴야 되는데 그런 욕심 때문에 실수를 더 크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는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도 겪었고, 리우올림픽 4강전에서 바람을 잘못 읽어 3점 과녁을 쏘는 치명적인 실수도 범했다. 하지만 웃었다. 지금의 실수가 다음 화살에 힘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오조준은 경험과 훈련에 통찰을 더한 마음의 조준이기도 하다. 인생도 양궁처럼 가끔은 오조준이 필요하다. 폭풍 같은 시련이 몰아칠 때는 과녁을 비켜 조준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를 더 자주 경험한다. 때문에 실패를 통해 성공이라는 과녁에 오조준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도 훈련을 통해 반복 연습하면 6점을 겨냥하면서도 10점을 맞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나 역시 처음부터 잘했던 선수가 아니다.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과정을 즐기려다 보니 점차 꿈과 가까워진 것이다.
올림픽 2관왕은 잊을 수 없지만, 어느새 과거의 영광이 되었다. 내게는 아직도 많은 경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승리로 기억되는 경기보다 개인전과 혼성전에서 8강에서 고배를 마시게 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임팩트가 더 크게 다가온다. 한국 양궁에 대한 믿음을 깬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도 컸고, 단단하다고 믿었던 멘탈도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곧 받아들였다. 나는 이 실패를 2020 도쿄올림픽의 자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한국 양궁은 선수층이 두텁고 기량이 뛰어난 선수도 많다. 적당히 안주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 선수들을 생각하면 활을 쥐고 있던 손에서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들의 성공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다. 열정과 훈련으로 만들어낸 정직한 결과물이다. 앞으로 벌어지는 경기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금메달이 아닌 현재의 실력이다. 실패 위에 쌓은 실력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실력을 위해 오늘도 나는 변함없이 활시위를 당긴다.
양궁선수 장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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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