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고 간 많은 사람의 사연이 길에 남아 있다.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는 광주라는 도시와 도시의 길에서 있었던 사람들이 100년 동안 남긴 이야기를 관광객에서 소개하는 시티투어버스다.
시티투어버스는 요즘 관광객이 좀 붐빈다 싶은 도시라면 다 있다.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도 여느 시티투어버스처럼 광주 시내에 시대의 이야기가 있는 곳을 돌아다닌다. 다만 관광객이 좀 더 알기 쉽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뮤지컬 형식의 공연으로 소개하는 점이 다르다. 광주 지역 전체가 뮤지컬 무대가 되는 셈이다.
1930년대 광주부터 현재를 지나 100년 뒤인 2030년대 광주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는 콘셉트로 만들었다. 투어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3회 운영된다. 금요일 저녁 투어는 토요일 투어에 어쿠스틱 기타 공연과 야경 명소인 뷰폴리가 코스에 포함된다. 관광객을 실은 버스는 두 번 정차한다. 선교정신과 근대예술의 중심이었던 1930년대 광주, 민주·인권·평화의 씨앗을 뿌린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17일의 광주에 이어 2030년대 아시아문화 중심도시로 꽃피울 광주다.
도시를 울긋불긋 물들인 단풍이 거리에 소복이 내려 쌓인 11월의 어느 날 광주를 찾았다. 만추에 접어든 광주의 아침은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몸을 움츠리고 서 있으니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총 3차례 운영한다. ⓒC영상미디어
토요일 오전 코스는 9시 30분에 광주송정역에서 출발한다. 버스 자리를 돌아보니 좌석의 약 3분의 2 정도가 찼다. 버스에는 다양한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구에서 친구들끼리 부부동반 모임을 온 그룹, 익산에서 가족 여행을 온 그룹, 서울에서 100년 이야기 버스를 타러 새벽에 출발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아주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는 버스안내원 ‘나비’가 1930년대, 1980년대 광주로 승객을 안내한다. ⓒC영상미디어
출발시간에 임박해서 자주색 옷을 입은 ‘안내원’이 버스에 올랐다. “내리실 분 나오세요~ 안 계시면 오라이~”로 승객들의 웃음을 터트린 안내원이 100년 이야기 버스에서 타임머신 여행을 안내할 ‘나비’다. 나비는 이야기 버스 투어의 마스코트다. 이미 100년 이야기 버스를 타본 승객들 사이에서는 나비의 호평이 자자했다. 나비가 등장하마자마 “블로그마다 나비 칭찬이 자자해서 궁금한 마음에 버스를 탔다”는 승객도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나비는 “제일 멀리서 오신 분 손드세요!”를 외치며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서울 강서구!”를 외친 승객이 첫 번째 선물의 주인공이 됐다.
선물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버스는 광주의 명소를 향해 달렸다. 광주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기아 타이거즈의 홈구장인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무등산에서 발원해 광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광주천’, 1933년 설립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상지인 ‘광주제일고’, 전국 홍어의 80%가 몰리는 ‘양동시장’, 광주의 대표 공원인 ‘광주공원’ 등을 차례대로 돈다. 명소를 지날 때마다 버스 앞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음악과 명소를 짤막하게 소개하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를 지날 때면 구장을 가득 메운 야구팬의 모습과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가가 흘러나오는 식이다.
광주 명소를 둘러보고 나면 첫 번째 정착지 양림동 역이 나온다. 양림동에서 내린 승객들은 나비와 함께 걸어서 양림동 곳곳을 둘러보는 도보여행을 시작한다. 승객들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양림쌀롱 여행자 라운지’다. 1930년대 가옥에 만든 양림쌀롱은 백열등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이 퍼지는 샹들리에, LP판, 니스칠이 꼼꼼히 된 붉은빛 마룻바닥이 예스런 느낌을 물씬 풍긴다. 양림쌀롱에 들어선 승객들은 인이어 이어폰을 하나씩 받는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마들렌과 따뜻한 차가 간식으로 나온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데우고 있으니 어느새 개량한복으로 갈아입은 나비가 등장한다. “제가 노래 한 곡 뽑아도 될까요?”로 관객의 박수를 유도한 나비는 1930년대 유행가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다. 나비가 노래를 시작하자 손에 단소를 든 남자가 건들거리며 나비 주변을 맴돈다. 남자주인공 ‘폴’이다. 풍각쟁이 냄새를 풍기는 폴은 심각하게 전화를 받더니 다음에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사라진다.
▶ 1930년대 독립투사들의 은신처로 사용된 ‘이장우 가옥’ ⓒC영상미디어
양림쌀롱을 나와 ‘이장우 가옥’으로 향한다. 1년 내내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그랜드피아노가 있을 정도로 광주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양림동 일대를 꽉 채울 만큼 컸던 집이 이제는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만 남았다. 이장우 가옥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 양식으로 지은 기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광무삼년을해이월십일축시’(서기 1899년)라고 공역한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다. ‘ㄱ’자 형태로 생긴 안채 마당에는 우물이나 오죽(烏竹)처럼 일반 기와집에서는 보기 힘든 것도 있다.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이니 가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장우 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들의 은신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붕 밑에 다락방이 있어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하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승객들이 이장우 가옥에 모여 있는 동안 다시 폴이 나타났다. 폴의 정체는 풍각쟁이인 척하며 정체를 숨기는 독립투사다. 나비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사라진다.
내가 서 있는 여행지가 뮤지컬 무대
투어는 오웬기념관으로 이어진다. 오웬기념관은 1904년 광주지역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인 유진 벨과 오웬이 세운 양림교회 안에 있다.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오웬이 죽은 후 지인들이 할아버지 오웬과 손자 오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오웬기념관이다. 1900년대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후에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이후 조선인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들을 보여준 드라마 ‘각시탈’의 촬영지다. 오웬기념관에서는 각시탈이 아닌 폴과 나비의 또 다른 드라마가 관객들 앞에서 펼쳐진다. 여기서 재회한 둘은 함께 ‘메기의 추억’을 부르며 나라를 잃은 젊은이들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한다.
폴과 나비의 애절한 노래가 끝난 뒤 ‘펭귄마을’로 향한다. 펭귄마을은 양림동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펭귄이 살아서 펭귄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는다고 해서 펭귄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펭귄마을은 오랫동안 방치된 빈집이 많아서 쓰레기장으로 전락했던 곳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이 골목을 청소하고 잡동사니를 모으면서 마을을 꾸미기 시작했다. 빈티지한 소품이 마을의 분위기를 바꾸자 관광객들이 다시 찾아들었다. 좁은 골목 옆 담벼락에는 주민들이 직접 그린 시화가 있고 할머니들이 신었던 고무신이 걸려 있다. ‘너는 손을 잡았고, 나는 맘을 잡았다’, ‘겨울 멋쟁이 얼어 죽고 여름 멋쟁이 더워 죽는다’처럼 재미있는 문구도 적혀 있다.
▶ 1 1930년대 광주 여행은 광주 양림동에 있는 양림쌀롱에서 시작된다. 2 양림쌀롱에서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
르는 나비와 관람객 3 이장우 가옥의 안채는 ‘ㄱ’ 자 모양이다. 4 펭귄마을 골목 담벼락에는 마을 주민이 만든 작품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5 오웬기념관에서 1930년대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나비와 폴 6 펭귄마을 곳곳에 주민들이 내놓은 잡동사니가 자리하고 있다. 7 버스가 서는 두 번째 정거장인 옛 전라남도청. 승객은 여기서 1980년 5월 17일로 여행을 떠난다. ⓒC영상미디어
펭귄마을을 빠져나온 후 1980년대 광주로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다시 버스가 멈춘 정거장은 1980년 5월 17일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오월광장’이다. 오월광장 앞에서 다시 폴이 나타난다. 폴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 관객들도 함께 노래한다. 오월광장 인근은 1980년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후의 격전지였던 전남도청 건물과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전일빌딩’,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했던 ‘상무관’을 둘러보며 당시 처절했던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본다. 옛 전남도청 건물을 배경으로 폴과 나비가 재회한다. 독립투사에서 민주열사로 환생한 폴을 나비는 한눈에 알아본다. 두 사람은 역사의 흐름 앞에서 다시 한 번 이별하며 끝이 난다.
여행의 종착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옛 전남도청 건물 바로 옆에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세계를 향한 아시아 문화의 창’을 기치로 2015년 문을 열었다. 역사적 상징이 있는 구 전남도청 건물을 보존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곳은 2030년 문화도시로 발돋움하는 광주를 나타낸다. 광주비엔날레, 광주여성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도맡아 지역의 문화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광주는 이런 문화행사를 기반으로 과거 격동의 시대를 지나 아시아문화 중심도시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다.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 운행 정보
운행시간 금요일 1회(19시), 토요일 2회(9시 30분, 14시 30분)
운영일정 12월 22일까지
소요시간 약 2시간 30분
금액 1만 원(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입장료 별도)
예매 광주시티투어버스 누리집(www.gjcitytour.kr)
문의 062-360-8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