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전설 보헤미안 랩소디

유슬기 위클리 공감 기자 2018.11.18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우린 ‘부적응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부적응자들’이에요.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 우린 그들을 위한 밴드예요.”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생전 모습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생전 모습 ⓒ연합

프레디 머큐리는 세계적인 록스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설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그 전설의 이야기가 30여 년의 세월을 넘어 한국에 도착했다. 10월 31일에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200만 명의 관객을 돌파하며 차트를 역주행하고 있다. 공연 실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스피커가 스크린 뒤와 천장, 측벽에 설치된 ‘싱어롱’ 상영관에서는 관객이 함께 ‘떼창’을 부르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주말 영화관에는 중·장년층이 유독 눈에 띄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4050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스타’는 우리가 함께 젊었고 푸르렀던 한때를 소환한다. 음악의 마법이다. 메가박스 관계자는 “주말 기준으로 사운드 특화관을 이용하는 관객 수가 2.5배가량 늘었다”고 했다. ‘보헤미안 랩소디’ 개봉 후 연달아 영화를 관람하는 ‘N차 관람’ 관객도 늘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관람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동창 모임을 영화관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단체 관람한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와 보아 등 뮤지션들

‘보헤미안 랩소디’를 단체 관람한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와 보아 등 뮤지션들 ⓒ보아 SNS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 역시 회사의 뮤지션들과 함께 ‘보헤미안 랩소디’ 단체 관람에 동참했다. 이 영화가 차트를 역주행할 수 있었던 것도 4050세대가 영화를 본 뒤 ‘음악을 듣다가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비트에 맞춰 발을 구르고 목청껏 따라 부르고 있었다’는 후기를 올리면서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이 영화는 그 주인공이 ‘퀸’이었기에 가능하고, 그 공연의 중심에 전설 프레디 머큐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극장, 공연장이 되다

밴드 퀸은 대학교 밴드인 ‘스마일(smile)’로 시작했고, 1969년부터 ‘퀸(Quee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이후 1971년 베이시스트 존 디콘이 영입된 후부터 4인조 록밴드 퀸이 완성되었지만, 이들의 음악에 평론가들은 혹평 일색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퀸의 음악에 반응했고, 1975년 만든 4집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들을 세계적인 밴드로 만든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세계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노래다.

10월 31일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10월 31일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최초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된 노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곡은 6분 가까이 이어진다. 아카펠라와 오페라, 록을 넘나드는 편곡도 이색적이다. 가사는 또 어떤가. “Mama, just killed a man(엄마, 사람을 한 명 죽였어)”로 시작한 노래는 “Mama, ooh, (Any way the wind blows) /엄마, 오, (어떤 식으로 바람이 불든) I don’t want to die /난 죽고 싶지 않아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난 가끔씩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어”로 이어진다. 계속 이어지는 Mama는 오페라의 Oh! Mamma mia와 대구를 이루며 장르를 전환시킨다. 이 곡에 쓰인 합창은 퀸의 멤버들이 여러 번 녹음해서 만들었다. 다른 멤버들은 몇 번의 녹음을 거치는 동안에도 도대체 어떤 음악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퀸에서 기타리스트였던 브라이언은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망설였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프레디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오랜 시간 망설였던 이들은, 자신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프레디에 대해 제작할 것이고, 그렇다면 더욱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고 했다. 프레디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가까이 제작에 몰두했다.

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가세가 기울어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고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의 꿈을 키우던 아웃사이더 프레디 머큐리는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음악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꿈을 응원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도, 그의 옷도, 그의 남다른 행동들도 지적 거리였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주눅 들지 않았다. 퀸의 드러머였던 로저는 “사람들은 프레디 머큐리의 이색적이었던 행동들을 기억하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그는 대단한 뮤지션이었다”고 말한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뮤지션으로서 프레디를 집중 조명한다. 사람들을 웃게 하고, 울게 하는 그의 힘을 말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던 프레디는 발레와 오페라 그리고 록을 두루 사랑했다. 초기에는 ‘글램록(glam rock)’으로 시작한 퀸의 음악은 점차 다양한 장르로 진화한다. 그 진화는 모든 장르를 작곡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었던 싱어송라이터 프레디 머큐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언론은 여전히 퀸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퀸 역시 언론을 멀리하면서 이들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평론가들은 퀸의 인기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었다고 했고, 퀸의 음악은 일관성이 없다고 했다.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떠나는 시간 여행

하지만 그 어떤 평론가도 냉소하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잦은 해체설과 루머에 시달리며 2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퀸은 1985년 7월 13일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에티오피아 난민 돕기 자선 콘서트에 참여한다. 당대 내로라하는 팝 뮤지션이 참여한 이 공연에서 퀸은 한물간 밴드 취급을 받았다. 허나 노래가 시작되자 달라졌다. 술, 담배와 약으로 망가진 성대와, 병으로 부서져 가는 몸이었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전무후무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흰색 민소매 옷을 입고 피아노를 치고, 무대를 휘저으며 노래를 부르던 프레디는 그야말로 ‘무대를 씹어 먹었다.’ 그의 무대에 매료된 7만 2000여 명의 관객은 일사분란하게 반응했고 폭발적으로 화답했다. 그 자리에 들어찬 수만 관객을 ‘조련’할 수 있는 뮤지션은 오직 프레디 머큐리였다. 

1975년 영국의 주간차트 1위에 올랐고, 1985년 퀸을 다시 정상에 올려놓은 ‘보헤미안 랩소디’는 1991년 다시 한 번 차트 1위에 오른다. 프레디 머큐리의 부고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죽기 전날,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발표했고 24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들도 함께 사라진 날이었다.

LP바에서 퀸의 노래를 신청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1 LP바에서 퀸의 노래를 신청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연희 38 애비뉴

싱어롱 시사회’는 스피커가 전면, 후면, 측면에 설치돼 마치 공연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 ‘싱어롱 시사회’는 스피커가 전면, 후면, 측면에 설치돼 마치 공연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CGV 

2018년, 세상은 다시 ‘보헤미안 랩소디’로 떠들썩하다. 영화 역시 평론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관객은 퀸에게 반응하고 있다. LP바에는 퀸의 명곡을 틀어달라는 주문이 빗발치고 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서 음악바 ‘재즈 잇업’을 운영하는 김정욱 대표는 “요즘 신청곡 중에는 퀸의 노래가 반 이상”이라고 말했다. 퀸의 노래 중 전 세대에 잘 알려진 ‘위 아 더 챔피온(We are the champion)’이나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를 틀면 신청자든 아니든 모두가 ‘떼창을 한다’는 후문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지난 9월 발간한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음악에 대해 이렇게 썼다.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난 뒤 태어난 이들도 퀸의 노래를 부른다. 깊어가는 가을밤, 사람들의 귓가에 ‘보헤미안 랩소디’가 흐르는 이유다.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황석희 번역가가 밝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비밀

1 최초 결정된 감독은 데이빗 핀처였으나 견해 차이로 하차했다.

2 브라이언 싱어 감독 하차 후 나머지를 완성할 감독으로 거론된 사람 중엔 리들리 스콧도 있었다(실제로 미팅도 했다고 한다)

3 라미 말렉(프레디 역)과 루시 보인턴(메리 역)은 실제 연인이다.

4 라미 말렉과 프레디 머큐리의 키 차이는 2cm에 불과하나 프레디가 워낙 하체가 길었기 때문에 훨씬 커 보이는 기분이 든다(아무 바지나 입어도 하이웨이스트인 프레디 머큐리).

5 조셉 마젤로와(존 디콘 역) 라미 말렉은 HBO의 전쟁 서사시 ‘퍼시픽(The Pacific)’에 유진 슬래지와 스내푸 역으로 같이 출연했다.
 
6 EMI 제작자로 나온 마이크 마이어스는 “‘보헤미안 랩소디’는 10대들이 차에서 볼륨 높이고 머리 흔들면서 들을 노래가 아니다”라며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본인이 출연했던 1992년 작 ‘웨인즈 월드(Wayne’s World)’에서 친구들과 차를 타고 가며 ‘보헤미안 랩소디’를 틀어놓고 헤드뱅잉 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스스로 놀려먹고 싶어서 ‘보헤미안 랩소디’에 출연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7 휴게소에서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인물을 카메라로 유난히 오래 잡아준다. 퀸의 보컬로 공연을 하기도 한 아담 램버트의 카메오 신이다.

8 ‘Another One Bites the Dust’ 연주 일부는 실제 배우들의 연주였다.

9 밉상으로 나온 폴 프렌터는 프레디가 죽기 3월 전 에이즈로 사망한다. 프렌터가 언론사에 팔아넘긴 프레디의 추문 값은 3만 2000파운드(약 4712만 원)였다.

10 라미 말렉은 프레디의 동작을 연구, 연기하기 위해 전문 안무가를 대동하고 연기했다.

11 레이디 가가의 이름은 ‘라디오 가가’에서 나온 것. 브라이언 메이와의 콜라보가 결정된 것만으로도 레이디 가가가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얘기가 있다.

12 브라이언 메이는 6펜스 동전을 피크 대신 사용하기로 유명한데 이 영화에서도 동전을 썼는지는 확인이 안 됐다. 수십 번을 손만 봐도 확인 못 했다. 블루레이가 나오면 프레임별로 뒤져보려고 한다.

13 ‘보헤미안 랩소디’의 짐 허튼과 ‘데드풀 2’의 피터는 다른 인물이다.

14 ‘라이브 에이드’에서 마이애미가 볼륨을 올리는 장면은 그 당시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이 이상 볼륨을 올리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다는데 마이애미가 슬쩍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퀸의 무대 사운드만 쭉쭉 뻗었다는 풍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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