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2일 자정으로 향하는 시간, 두산과 SK의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린 잠실구장의 열기는 대낮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SK가 5-4로 앞선 연장 13회 말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두산의 마지막 타자 박건우를 헛스윙 삼진 처리하며 우승을 확정한 순간, 뒤를 돌아 두 팔을 크게 벌렸다. 2010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SK가 우승할 때도 마운드엔 김광현이 서 있었다. 당시 스물둘의 김광현은 모자를 벗어 베테랑 포수 박경완에게 허리 숙여 인사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8년이 흐른 뒤 부상과 슬럼프를 딛고 또다시 한국시리즈를 마무리한 김광현은 이번엔 자신의 뒤를 든든히 지켜준 야수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넨 것이다.
▶ 11월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두산베어스와의 6차전 경기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시상식에서 모자를 하늘로 던지고 있다. ⓒ연합
SK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두산을 꺾고 2007년과 2008년, 2010년에 이어 통산 네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정규시즌 2위로 가을 잔치에 나간 SK는 넥센과 플레이오프 5차전 혈투 끝에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압도적인 정규시즌 우승팀 두산마저 무너뜨리면서 1989년 해태 이후 29년 만에 2위 팀의 ‘업셋(하위 팀이 상위 팀을 누르는 것)’ 우승을 달성했다. KBO리그가 단일리그로 치러진 1989년 이후 정규시즌 우승팀이 아닌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은 SK가 다섯 번째다. 아울러 정규시즌에서 두산에 무려 14.5경기 차 뒤졌던 SK는 최다 승차를 극복하고 우승한 팀이 됐다. 이른바 ‘어우두(어차피 우승은 두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깬 우승이었다.
한화·넥센의 약진, ‘엘롯기’의 부진, NC의 몰락
KBO리그 사상 첫 외국인 우승 감독이 된 트레이 힐만 감독의 탈권위와 소통의 리더십도 밑거름이 됐다. SK 선수들은 “이런 감독은 처음이었다”라며 “감독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라도 우승 트로피를 바치겠다”고 힘을 모았다. 선수들의 마음까지 세심히 챙겼던 힐만 감독은 정규시즌엔 긴 호흡으로 장기 레이스에 임했고, 포스트시즌에선 특정 선수와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 용병술과 다양한 수비 시프트 및 작전으로 기민한 대처를 했다. ‘빅볼’과 ‘스몰볼’을 적절히 섞은 힐만 감독의 변화무쌍한 전략에 막강 두산도 무릎을 꿇고 말았다.
▶ 1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이 11월 9일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인터뷰하고 있다. 2 11월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 연장 13회 SK한동민이 홈런을 친 뒤 박재상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연합
SK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올 시즌 최대 화두는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초대된 한화의 약진이다. 비록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한화는 2008∼2017년까지 10년 동안 가을 잔치의 구경꾼으로 전락해 KBO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을 잔치에 나서지 못한 팀이었다. 한용덕 감독이 새 지휘봉을 잡고 출발한 한화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박병호가 돌아온 넥센은 2년 만에 가을 야구에 안착했고, 디펜딩 챔피언 KIA도 어렵게 포스트시즌행 막차를 타 체면을 살렸다. 반면 류중일 감독 체제로 새 출발한 LG는 두산에 1승 15패로 참패하는 등 ‘역대급 추락’으로 가을 야구 목전에서 퇴장했고, NC는 김경문 감독이 시즌 도중 물러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창단 첫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KT는 ‘슈퍼루키’ 강백호를 앞세워 4년 만에 꼴찌에서 탈출했다.
두산은 비록 가을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지만 정규시즌에선 역대로 손꼽히는 극강 모드를 과시한 끝에 세 번째 정규시즌 우승(1995, 2016, 2018년)을 차지했다. 덕분에 개인 타이틀도 두산의 집안 잔치로 끝났다. 김재환은 1998년 타이론 우즈(42개·OB) 이후 20년 만에 잠실 홈런왕(44개)에 올랐고, 타점(133개)까지 2관왕을 차지했다. 세스 후랭코프는 18승으로 다승왕에 등극했고, 조쉬 린드블럼은 평균자책점 1위(2.88)에 올랐다. 타격왕은 막판 부상으로 시즌을 조기 마감한 김현수(0.362·LG)가 앉아서 거머쥐었다. 박병호는 5시즌 연속 홈런왕을 이어가는 덴 실패했지만 출루율(0.457·넥센) 타이틀을 가져갔다. 최다 안타는 전준우(190개·롯데), 도루는 박해민(36개·삼성), 세이브는 정우람(35개), 탈삼진은 키버스 샘슨(195개·이상 한화)의 몫이었다.
프로야구 관중은 4년 연속 800만 명을 넘어섰지만 전년 대비 관중 수는 5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올해 누적 관중은 807만 3742명(경기당 평균 1만 1214명)으로 집계됐다. KBO리그는 2016년 총 833만 9577명이 경기장을 찾아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8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에는 840만 688명(경기당 평균 1만 1668명)으로 시즌 최다 관중 기록을 다시 새로 썼다. 올해도 800만 관중은 돌파했지만 지난해 동일 경기 수와 비교하면 약 4%가 줄었다. 관중이 전년 대비 줄어든 것은 2013년 이후 5년 만이다. 목표를 이룬 팀은 한화, SK, 삼성뿐이다. 두산은 목표 관중(115만 명)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10개 구단 중 가장 많은 111만 2066명(평균 1만 5445명)의 관중을 모았다. 아울러 두산은 한국 프로스포츠 구단으로는 처음으로 10년 연속(2009∼2018년) 100만 관중 기록도 세웠다. 반면 이장석 전 대표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넥센은 돔구장을 안방으로 쓰면서도 지난해보다 무려 35%나 관중이 덜 찾아 리그 전체의 감소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넥센은 또 지난 5월 23일엔 포수 박동원과 마무리투수 조상우의 성폭행 혐의가 알려져 야구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NC도 2013년 KBO리그에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순위가 최하위로 추락하면서 지난 시즌보다 관중이 17%나 빠졌다.
올 시즌 KBO리그는 시즌 초반 미세먼지와 국민적 관심이 몰렸던 러시아월드컵 등 악조건 속에서도 지난해보다 9경기나 적은 426경기 만에 500만 관중을 채웠다. 하지만 7∼8월 전국을 달군 기록적인 폭염이 야구 열기를 끌어내렸다. 7월 평균 관중은 9505명으로 6월(1만 1945명)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이어 아시안게임 기간에 18일(8월 17일∼9월 3일) 동안 리그를 중단한 데다 ‘병역 특혜’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팬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졌다.
이제 10개 구단은 내년 시즌 준비를 위한 스토브리그에 돌입했다. 넥센은 키움증권을 새 스폰서로 맞아 내년부터 간판을 키움 히어로즈로 바꿔 단다. 사령탑의 이동 및 선임도 활발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직후 SK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힐만 감독의 후임으로 염경엽 단장을 선임했다. 이강철 두산 수석코치가 KT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NC는 앞서 가장 먼저 이동욱 수비코치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으며, 롯데는 양상문 전 LG 단장을 감독으로 컴백시켰다.
성환희 한국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