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오너 일가와 대웅제약 오너의 직원 폭언, 서울아산병원 신입간호사의 ‘태움’ 자살, 한림성심병원 간호사들에 대한 선정적 장기자랑 강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직원 폭행과 엽기 행각…. 연이은 ‘직장 갑질’ 폭로에 국민은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직장인의 73.3%가 직장에서 괴롭힘을 경험했고, 12%는 거의 날마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 갑질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지난 7월 18일 ‘직장 등에서의 괴롭힘 근절 대책’이라는 처방전을 내놓았다.
직장갑질 119는 지난해 11월 1일 출범한 민간 공익단체다. 이름만 얼핏 들어도 갑(甲)질 당한 직장인 을(乙)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단체임을 알 수 있다. 직장갑질 119의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2016년 겨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며 광장의 민주주의 바람을 어떻게 하면 이분들의 직장으로 이어갈까를 고민했다”며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그분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공간을 고민했고, 그 고민들이 직장갑질 119로 기안된 것”이라고 했다.
▶ 오진호 직장갑질 119 총괄스태프가 서울 중구 정동 사무실에서 휴대전화와 함께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을 안내하는 홍보물을 들고 참가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직장갑질 119에 참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에 ‘직장갑질 119’를 입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태프의 이메일 주소를 통해 개별상담을 받을 수 있다. 상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직장갑질 119를 입력하고 들어가 보니, 직장갑질 119를 비롯해 ‘제주 직장갑질 119’, ‘병원노동자 119’, ‘골프장노동자모임’, ‘대덕노동자 119’, ‘환경미화원’ 등 지역별·직종별 오픈채팅방들이 개설돼 있었다.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직장갑질 119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 등의 노동단체들이 직종별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 직장의 불공정 관행을 공론화하자는 취지로 만든 플랫폼”이라며 “변호사, 노무사, 노동 전문가, 일반 시민 등 241명으로 구성된 스태프들이 전문 상담을 통해 문제 해결을 도와준다”고 했다. 이어 “직장갑질 119는 직장 갑질을 당한 사람들의 일종의 커뮤니티로, 가장 편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접속할 수 있도록 카카오톡 채팅방을 활용하고 있다”며 “직장갑질 119라는 전체 모임 안에 지역별이나 직종별로 새로운 방을 만들어 자유롭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오 스태프는 직장갑질 119의 첫 제보는 정부기관이었다고 했다. 제보에 따르면, 계약직인 을은 갑으로부터 “야, 넌 시키는 거나 해!”, “네가 하는 게 뭐가 있어?”, “너 내 말 못 알아들어?”라는 말을 듣고 “인격모독, 언어폭력으로 퇴사를 고민 중에 있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7월 5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우리 사회의 못난 갑질은 이제 세계적 수치가 됐다”며 공공 분야부터 갑질을 근절하겠다고 말했고, 국무조정실은 ‘공공 분야 갑질 근절 종합대책’을 확정했지만, 우리의 갑질문화는 공공 분야나 민간 분야를 막론하고 이처럼 그 뿌리가 깊다.
오 스태프는 “양진호 회장이 따귀를 때리는 영상은 차마 끝까지 볼 수 없었다”며 “통제받지 않는 오너의 갑질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상”이라고 했다. 이어 “직장갑질 119에 들어오는 심각한 수준의 욕설과 폭행 제보 등 황당한 갑질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양진호’가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며 “드러난 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직장 갑질에 대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때가 됐다”고 했다.
직장갑질 119에는 2017년 11월 1일부터 지난 10월 31일까지 1년간 2만 8010건의 직장 갑질 제보가 접수됐다. 하루 평균 60~70건의 갑질 제보가 들어온다. 오진호 스태프는 지난 1년간의 활동 가운데 한림성심병원의 직장 갑질 근절과 일부 방송사가 프리랜서 스태프들에게 임금을 상품권으로 지급한 ‘상품권 페이’ 갑질 관행을 고친 것을 성과로 꼽았다.
특히 직장갑질 119 단체채팅방을 통해 직장 갑질을 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함께 고민하던 한림성심병원 구성원들이 노조를 설립하고 단체협약 타결까지 이끌어내는 성과를 내도록 도왔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직장갑질 119는 11월 2일부터 7일까지 이메일 19건, 카카오톡 오픈채팅 130건을 모아 <한림성심병원 갑질 보고서>를 만들어 민주당 강병원 의원실에 전달했다. 이 보고서 내용은 ‘행사 동원돼 선정적 춤… 간호사 인권 짓밟는 성심병원’이라는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고, 성심병원 직원들이 다시 익명으로 단톡방에 모여 제보를 쏟아냈다.
오진호 스태프는 “직장갑질 119는 한림대성심병원 담당 노무사, 변호사, 담당자를 정하고, 11월 9일 네이버 밴드에 ‘노동 존중 한림성심병원 모임’을 만들어 카카오톡 방에 성심 직원들을 초대했다”며 “병원 관리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 신원을 확인했고, 익명을 쓰도록 했다”고 했다. 이틀 만에 100명이 들어왔고, 밴드 가입 인원이 급증하면서 밴드에 새로운 제보와 증거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직장갑질 119와 보건의료노조는 고용노동부와 면담을 하면서도 <한림성심병원 갑질 보고서>를 제출하며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했다.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에 들어갔고 사회적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병원 측은 장기자랑, 화상회의 등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개인정보 노출 우려 땐 이메일로 상담
오진호 스태프는 “직장 갑질을 없앨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사실을 한림대성심병원 경우가 잘 보여주었다”며 “한림대성심병원의 갑질 폭로를 계기로 웬만한 회사의 장기자랑이 없어졌다고 하니 건전한 형태의 회사 장기자랑까지 우리가 없앤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직장갑질 119는 현재 한림성심병원, 중소병원 간호사, 보육교사, 방송계 종사자, 반월 시화공단 노동자 등 5개의 업종별 온라인 모임을 운영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오 스태프는 “상담을 받는 대다수는 내가 겪은 것이 과연 직장 갑질에 해당하는가를 의심하는 분도 많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 정도는 견뎌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며 “당장 내일 출근해 얼굴을 마주 봐야 할 상사의 갑질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신변의 불이익을 느끼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고 했다.
오 스태프는 “정말로 신원보호를 원하는 경우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익명으로 닉네임을 바꾸고 개인정보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하는 것이 좋다”며 “부득이하게 개인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경우엔 개인정보가 보호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과정을 거쳐 상담하고 있다”고 했다.
직장갑질 119 통계에 따르면, 전체 20~25%가 임금 문제고 다음이 상사의 폭언과 폭행, 따돌림 등이며 잡무 지시도 상당수 있었다. 오 스태프는 회사의 갑질 때문에 자살까지 시도했던 한 직장인의 경우를 소개했다. 경상남도의 한 소규모 주유소에서 일하는 피해자는 하루 14시간 근무에 월 100만 원을 받았다. 최저임금도 안 된다. 게다가 그는 주유소 일뿐만 아니라 사장이 운영하는 밭의 잡초를 뽑고, 사장이 운영하는 원룸의 청소까지 했다. 어느 날 주유 중 사장의 지인과 언쟁하다 폭행까지 당했는데, 사장은 되레 합의하지 않는다고 그를 해고했다. 피해자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오픈채팅방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 약봉지를 올리며 ‘자살’을 암시했고, 다행히 이상한 낌새를 챈 동료들의 발 빠른 대처로 현재 그는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오 스태프는 “노예처럼 일하다가 버려진 경우로, 실제 갑질을 당하는 사람은 인격이 모조리 파괴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갑질이 한 개인의 인생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절감했다”고 했다. 이어 “이분의 경우, 최저임금 부분은 법적으로 다퉈볼 수 있겠지만, 연장수당이나 부당해고에 대한 부분은 현행 노동법 체계에서는 5인 미만의 사업장이라 구제받기 어렵다”며 “큰 사업장의 경우에는 그나마 노조를 결성해 오너의 갑질을 막을 수 있지만, 주유소 직원들이 어떻게 노조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직장 갑질을 막기 위해서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갑질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는 지체 없이 직장갑질 119 등 상담기관에 위법성에 관한 문의를 꼭 해보라”고 권했다.
직장인 갑질지수 발표 계획
오진호 스태프는 직장갑질 119의 야심찬 계획 두 가지를 내놓았다. 하나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통과이고 또 하나는 ‘직장인 갑질지수’ 마련이 그것이다.
오 스태프는 “직장갑질 119가 지난 1년간 2800건이 넘는 상담을 하면서 현행법 체계가 직장 갑질을 막기에는 미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물리적 갑질보다 알게 모르게 겪는 정신적인 갑질이 많지만, 현행 근로기준법은 폭행을 제외하면 직장 내 다른 종류의 갑질은 처벌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우선 변호사와 노무사 등 직장갑질 119 스태프들과 토론을 통해 신고자를 익명으로 보호하고 고용주가 불이익을 줄 때 처벌하는 별도 조항을 두는 등 법제도 개선안을 마련해 곧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오 스태프는 직장인 갑질지수와 관련, “언론자유지수, 행복지수 등과 같은 한국 사회의 직장 갑질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지표가 있어야 한다”며 “현재 ‘대한민국 직장갑질지수’ 발표를 위해 지난 6개월간 해당 분야 교수들과 지수 산출을 위한 개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 지표를 개발하면 우리 사회의 직장 복지가 산업별, 고용형태별, 회사별로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직장 등에서의 괴롭힘 근절 대책’
직장 갑질 OUT!
정부가 근로기준법에 ‘직장 괴롭힘’의 정의를 마련하고, 직장 괴롭힘 금지 의무 신설을 추진한다. 또 근로기준법에 직장 괴롭힘 사건 발생 시 사용자의 조사·조치 및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조항을 만들고, 관련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업장에 대한 특별근로감독 시행을 검토한다.
직장 괴롭힘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의료인은 면허정지를 하도록 의료법을 개정하고, 국가연구개발과제 수행 중 대학원생을 괴롭혀 징계를 받은 교수에 대해선 연구과제 수행을 중단시키는 방안도 추진한다. 정부는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한 ‘직장 등에서의 괴롭힘 근절 대책’을 지난 7월 18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확정했다. 정부가 앞서 7월 5일 공공 분야 갑질 근절 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민간 분야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직장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 한국은 업종별 피해율이 3.6∼27.5%로 유럽연합(EU) 국가들보다 2배 이상 높다. 2016년 직업능력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직장 괴롭힘으로 인한 근로시간 손실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연간 4조 7000억 원에 이른다.
정부는 직장 괴롭힘 대응을 위해 6단계, 21개 개선과제를 마련했으며 의료, 교육, 문화예술·체육 등 주요 분야에 대해서는 분야별 맞춤 대책을 추가했다. 정부는 직장 괴롭힘 방지를 위해 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의료법·고등교육법·예술인복지법 등 5개 법률과 근로감독관 집무 규정, 취업규칙 표준안 등 개정에 나선다. ‘직장 괴롭힘 방지 특별법’ 제정도 검토한다.
정부는 관련법 제·개정에 시간이 소요되기에 10월까지 괴롭힘의 개념, 유형, 사례, 판단 기준을 포함한 가이드라인과 취업규칙 표준안부터 내놓는다. 정부는 부당하도급, 기술 탈취, 가맹ㆍ대리점 비용 전가 등 민간기관 간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기 위한 대책도 마련해 올해 12월에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