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서울 성수동 뚝도시장 문화기업 '컬처 폴'의 거침없는 도전
지난해 가을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 거대한 노란색 고무오리 ‘러버 덕(Rubber Duck)’이 출현했다. 가로, 세로 각 16.5m, 높이 19.8m, 무게만도 1톤.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이 시민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제공하고 놀라움과 웃음을 주고 싶다는 의도로 만든 공공미술 프로젝트였다. 그 오리가 머무는 동안 석촌호수에는 500만 명이 다녀갔고, 러버 덕의 축소판 인형은 사흘 만에 1만 개 물량이 동났다.
▷펭귄 인형과 포즈를 취한 안주용, 김현후, 권병우, 김일환 씨(왼쪽부터). 펭귄은 이들의 사업 동반자다.
호수에 떠 있던 러버 덕은 김현후(26), 안주용(26) 두 청년에겐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 고무오리가 ‘우리도 뭔가 놀 거리를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당시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현후 씨는 2년간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던 세칭 ‘언론 고시생’이었다. 최종 면접에도 여러 차례 올라갔지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스무 살 때부터 오직 기자를 꿈꿔왔던 터라 허탈감은 컸다. ‘이제 뭘 하지?’ 기자의 꿈을 접기로 하자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고교 동창이자 같은 대학 학과 친구인 주용 씨를 불렀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때였어요. 술 마시든가 아니면 PC방가고. 그러다 주용이를 불러 ‘우리처럼 놀기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막상 할 게 없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느니 뭔가 재미있고 의미 있는 문화 관련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죠.”
당시 졸업을 앞둔 주용 씨는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군데 시험도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면서 점점 취업원서 쓰기가 싫어졌다고 한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란 게 그래요. 성공한 경험을 써라, 실패한 경험도 담고. 이것저것 쓸 게 많아요. 그러다 ‘내가 왜 이걸 쓰고 있지? 저 사람들이 꼼꼼히 읽어볼 것도 아닌데. 왜 여기에 목을 매고 있지?’ 싶더라고요. 취업은 나중에 하더라도 20대인 지금 굳이 취업에 매달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주용 씨는 친구의 제안을 받고 흥미를 느꼈다. 서로 죽이 잘 맞아서 ‘나중에 함께 일해보자’는 얘기를 많이 나눈 사이라 선뜻 응했다. 어차피 몇 년 뒤에 할 것이라면 지금 하자는 생각이기도 했다.
▷시장 입구에 선 네 청년들. 시장조사 직업도 이들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뭔가 재미있는 일 ‘의기투합’
펭귄 캐릭터 인형 네 마리 제작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청년은 ‘문화 극지’라는 뜻을 지닌 ‘컬처 폴(Culture Pole)’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문화적 역량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제대로 노는 것이야말로 청년 문화의 하나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다루는 조직 틀을 차차 완성해보자는 게 생각한 전부였다.
일단 놀 수 있으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 했다. 그러려면 석촌호수에서 본 ‘러버 덕’ 같은 캐릭터가 제격이었다. 극지라는 단어를 쓴 만큼 펭귄을 캐릭터로 정하고 제작을 맡겼다. 성인이 쓰고 다니기에 버거운 높이 약 1.5m, 무게는 족히 8kg이 넘는 펭귄 4마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봤죠. 거리로 뛰쳐나온 캐릭터 인형에 왜 사람들이 모일까? 그리고 사람들의 시간을 잠깐이라도 뺏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이벤트를 도입부로 쓰고 그 뒤에 콘텐츠를 담을 수 있다면 가치는 나중에 투영하자. 그래서 인형이 먼저 나온 거예요. 일의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말이죠.”(김현후)
“병우야, 뭐 하냐?” 현후, 주용 씨와 고교 동창인 권병우(26·아주대 심리학과) 씨가 친구의 전화를 받은 건 그 무렵이었다. 그는 중국어학연수를 다녀와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뒤 토익을 공부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놀 때는 뭐 하고 노는지. 생각해보니 기억에 남는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1년 정도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앞으로 취직을 하더라도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펭귄이 네 마리니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주용 씨가 절친한 대학 같은 과 선배인 김일환(27) 씨를 꼬드겼다. 그는 당시 기업 두 곳으로부터 최종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입사가 확정된다면 출근 시작하기 전까지 함께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후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업 아이템을) 정확히 물어보진 않았는데 ‘하다 보면 완성되겠지’ 했어요. 엉뚱하지만 일단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응시한 두 회사에 다 떨어져 지금에 이르렀지만요. 다음 취업 시즌까지 마땅히 할 것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보다 이 일을 하는 것이 더 주도적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네 청년은 지난해 12월 컬처 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무거운 펭귄 탈을 쓰고 무작정 서대문구 신촌 거리로 나섰다. 딱히 무엇을 기획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호기심에 모인 사람들은 줄을 서가며 펭귄들과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이틀 후 청년들은 신촌의 여세를 몰아 종로 보신각으로 나갔다. 게임을 준비했는데, 그것을 해보기도 전에 현후 씨의 휴대전화 액정이 깨질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이들은 당초 의도대로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를 채울 내용만 있으면 됐다.
그런데 사실 이들에겐 펭귄을 옮길 운반비 8만 원조차 없었다. 우선 머물 거점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들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에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등 사회적 경제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말을 들었다. 수소문 끝에 성수동 뚝도시장 활성화를 추진하는 사업단을 알게 됐고, 시장에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네 ?년들은 회의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조금 뒤로하고 조율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쇠락한 곳에서 찾은 기회
시장 상인들도 마음 열고 다가와
1962년 개장한 뚝도시장은 한때 400여 점포가 모인 서울의 3대 전통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다 2001년 시장 건너편에 대형 할인점 본사가 들어서면서 상권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시장이 폐쇄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아! 이건 아니야.’ 시장 입구에 들어선 네 청년의 첫 탄식이었다. 중앙통로 양쪽에 늘어선 채소가게, 생선가게, 고깃집이며 먹을거리, 볼거리 풍성한 여느 전통시장과는 딴판이었다. 봉제공장, 수제구두공장, 창고 빼곡한 곳에 뜨문뜨문 일반 점포와 식당 등이 있을 뿐. 과거 가내수공업체와 관련된 가게들이 밀집한 성수동의 특성을 반영한 곳이었다.
네 청년들은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 쇠락해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을 수 있을지 우려했다. 종로구 자하문로1길 통인시장의 잘나가는 ‘열정감자’(<위클리 공감> 288호 참조) 청년들처럼 장사를 할 것도 아니었고 시장에서 다른 뭘 할 수도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병우 씨의 말이다. “서울에 이런 데가 다 있구나. 저희 또래는커녕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요. 겨울이라 황량하기 그지없었고요.”
모두들 ‘우리의 한계’라고 생각할 즈음, 주용 씨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단다. 이미 활성화된 시장에선 가난한 자신들을 받아줄 리 만무하니 차라리 이곳이야말로 기회가 더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청년들은 1년간 폐가나 다름없는 상점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으랏차차 뚝도 기획단’과 함께 쓸 공간으로 만드느라 보름 이상 걸린 대공사였다. 설을 앞둔 올 2월 초 컬처 폴은 기획단 사무실에 자신들의 마스코트인 펭귄을 전시하고 청년기업 컬처 폴의 출범을 알렸다.
뚝도시장은 올해 전기를 맞고 있다. 중소기업청은 올해 전통시장 지원을 위해 지난해보다 35% 증가한 2822억 원을 투입한다. 자구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전통시장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한지원이다. 이를 위해 시장 특성에 따라 골목형 시장, 문화관광형 시장, 글로벌 명품시장 등 3개 유형으로 분류해 디자인, 신상품 개발, 서비스 등의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뚝도시장은 골목형으로 선정돼 시장 되살리기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제 여기에 어떤 문화를 심을까.’ 먼저 이들은 변화의 전기를 마련한 뚝도시장과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컬처 폴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고자 했다. ‘대체 뭐 하는 애들이지?’ 의아해하던 상인들과 이웃들은 냉장고며 집기를 가져다주고 살갑게 대했다. 밥 한 술 더 떠주려는 식당 아주머니의 정도 느끼며 청년들은 뚝도시장의 이웃 이 돼갔다.
아무리 전도유망하다 해도 무모해 보이는 도전엔 집안의 반대가 있게 마련. 특히 주용 씨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단다.
“집에선 당연히 안정적인 삶을 바라죠. 저야 아무래도 사회 경험이 많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될 것 같다며 취직하라 하시니, 저는 취직보다는 멀리 보고 창업하는 게 낫다고 아버지를 계속 설득했죠. 지금도 아버지가 저를 완전히 이해하시는 건 아니지만 취업 시장도 어렵고 하니 일단은 저를 내버려두는 게 아닌가 합니다.”
청년들은 두 달 가까이 첫 사업을 준비했다. 그들 중 3명이 경제학과 출신인 만큼 ‘시장 속 경제학교’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일환씨가 주도해 이달부터 시작한 학교는 지역아동센터와 연계해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경제 법칙에서부터 소비자 심리, 일일 점포 운영에 이르기까지 시장경제학을 가르친다.
청년들의 모델은 정부에서 실시하는 ‘자유학기제’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향후 자유학기제 협력 기업이 되는 것이 컬처 폴이 추진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시장 속 경제학교 수업 모습. 이 프로그램은 네 청년들이 자유학기제와 접목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오는 10월 이야기 축제 기획
무모한 열정 또 다른 출발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교육과정 중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등 시험을 보지 않는 대신 꿈을 찾을 수 있게 토론이나 실습수업, 진로 탐색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하게 하는 제도다. 내년부터는 전국 모든 중학교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뚝도시장에서 콩나물 비빔밥으로 유명한 ‘서울 맛집’을 운영하는 마리아(22) 씨는 컬처 폴로부터 뜻밖에 경제학교 강사로 초청받아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제 경험을 평소에 아는 아이들에게 전달하면서 그들과 더 친밀해져 좋았어요. 컬처 폴 청년들이 젊은 사람이 드문 이곳에서 성공해서 광장시장처럼 활기가 넘치게 하면 좋겠어요.”
현후 씨는 청년 창업이라고 하면 음식점, 옷가게, 커피숍 같은 단순 직종에 몰려 있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정책도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저희도 전통시장에 들어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어요.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청년들이 시장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요. 단지 그 정보를 모를 뿐이죠. 누구나 다 장사를 할 수 있는 게 아닌 만큼 문화나 시장 활성화 사업 등 다양한 분야로 창업 아이디어를 구상하면 좋겠어요.”
그가 자신의 일을 홍보하며 협조를 구하러 다닐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대학은 졸업했어요? 돈은 벌어요?”였다. 대학생 창업 동아리가 많은 요즘, 한편으론 창업하고 싶다며 공연히 지역사회만 들쑤셔놓고 내빼는 경우가 적지 않아 계속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되물음이었던 것.
컬처 폴은 자신들의 사업 전망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끈 펭귄 캐릭터를 활용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는 이는 일환 씨다. 병우 씨는 청년들의 소통공간을 만들고 싶단다. 예능계 대학생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졸업전시회를 위해 공을 들이는데 인사동 등지에서 하루 전시하고 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이런 작품을 시장에서 전시하고 청년들이 함께 어울려 소통한다면 나름의 청년 문화를 낳을 수 있을 것이란 게 병우 씨의 구상이다.
뚝도시장에 모인 네 청년은 앞으로 컬처 폴의 기반을 더 닦아서 협동조합으로 만들 생각이다. 협동조합에는 최소 5명의 구성원이 필요한데 중국에 유학 중인 친구가 뜻을 같이해 조만간 합류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다가올 10월 지역축제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인근 지역이 조선시대 왕실 사냥터였다는 점에 주목해 기획한 사냥축제와 마을에 흐르는 이야기 축제 등을 펼칠 기회다. 가진 건 청년의 무모한 열정 하나밖에 없는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뚝도시장의 버팀목이 돼갈지 자못 궁금하다.
글 · 박길명 (위클리 공감 기자) 2015.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