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컷] 배우 손예진

2018.11.12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2008년 연말의 영화제에서는 두 편의 영화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그리고 ‘아내가 결혼했다’의 나였다. 이 영화를 계기로 공효진 배우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여배우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 경쟁하기에도 턱없이 작은 작품들을 해야 하고, 그나마도 잘 해내야 다음 사람에게 기회가 있다. 매번의 작품을 ‘길을 낸다’는 심정으로 임하게 된다. 그리고 8년이 흘렀다. 2016년 나는 ‘비밀은 없다’라는 작품을 만났다. ‘미쓰 홍당무’를 만든 이경미 감독의 영화였다. 그의 작품 속에서 여자주인공은 예쁘거나, 품위 있거나, 명석하지 않다. 다만 돌진한다. 나로서는 한 번도 도전해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해보고 싶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역할만 하다 보면 그 안에 갇히게 된다. 중학생 아이가 있는 엄마 역할이라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새로운 길을 내야 하는 시점이었다.

2006년 고(故) 김주혁 배우와 함께한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한 장면

2006년 고(故) 김주혁 배우와 함께한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한 장면 C영상미디어
 
생각해보면 ‘아내가 결혼했다’도 그랬다. 결혼을 한 번 더 하겠다는 당돌한 계획을 하는 ‘주인아’는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너무 도발적이고 또는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함으로써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오가던 나의 필모그래피는 다채로워질 수 있었다. 배우로서의 자신감도 생겼다. 장르를 배신하는 쾌감을 맛봤다. 결국 새로운 인물을 만나, 전에 없던 얼굴을 보여주는 게 배우의 몫이다. 하지만 나에게 두 편의 작품이 뜻깊은 이유는 더 있다. 두 작품 모두, 김주혁 배우와 함께했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이 부각되는 영화이기에, 주연배우로서 선뜻 맡기 어려운 인물일 수 있는데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부각되는 인물인가, 서포트하는 인물인가를 구분하기 전에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를 봤다. 그가 든든히 곁을 지켜준 덕분에 나는 새로운 장르에서 나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내가 배우로서 성장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에 그가 늘 함께였다.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현장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좀 쑥스러웠다. 작품에서 만나면 저마다 제 역할에 몰입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인사할 기회마저 사라졌다.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장 좋은 때’에 그가 사라졌다. 모든 게 거짓말 같다.

얼마 전에 김주혁 배우의 1주기였다. 올해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나와 그는 함께 상을 받았다.  나의 20대와 30대에 가장 중요한 작품에 그가 함께였다. 어느새 연기를 시작한 지도 18년이 되어간다. 얼마 전 ‘협상’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는데, 비슷한 때 함께 개봉한 영화 ‘안시성’에는 조인성 배우가, ‘명당’에는 조승우 배우가 출연했다. 우리는 2003년 ‘클래식’을 함께했었다. 사람들은 이를 ‘클래식 매치’라고 불렀다. 나는 이들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 ‘경쟁작’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한 분야에서 15년을 함께한 것만으로도 ‘장하다’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응원해주고 싶은 동지의 마음이다. 연기를 한 세월이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래의 배우들은 ‘내 인생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한다고 들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연기가 곧 내 인생이라는 걸 알았다. 나를 스쳐간 그 많은 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을 만나면서 나는 작품을 ‘비틀어 보는 법’을 배웠다. 이전의 작품은 다음 작품의 좋은 스승이다. 때로는 어깨가 무겁다. 보는 이들이 ‘또 나왔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연기를 사랑한다. 꾸준히 하기 위해 내가 찾은 답은 이렇다. 열심히 하는 것. 매일매일 운동하면서 스스로 에너지를 잃지 않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 ‘고마운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사는 것’.

 

배우 손예진

배우 손예진

페이지 맨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