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심리학은 사람보다 상황을 본다. 사람을 바꾸기보다 상황을 바꿔 결과를 바꾼다.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을 쓴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내 능력을 더 뛰어나게 만들거나, 내가 더 개방적이 되거나, 내가 더 우호적으로 변해서 결과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창조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과 같은 표현보다 창의적인 상황에 나를 넣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워킨맵(Work in Map)’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스타트업 ‘솔깃’은 ‘솔깃한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끊임없이 거래처를 찾아다녀야 하는 영업사원에게 ‘워킨맵’은 그런 장치다. 일일이 지도를 검색하지 않아도, 내가 가야 할 곳들이 지도에 표시된다. 주소를 텍스트로 보지 않고 지도로 본다. 영업의 대부분은 감정노동이다. 워킨맵은 영업에 필요한 정서의 노동을 줄여준다. 심리학 용어로 보자면 ‘정신적 자원’이 훨씬 덜 드는 일이다. 이 앱은 2017년 ‘창업선도대학’에 선정되기도 했다.
인문계 학과 재학 중에 만든 스타트업
‘솔깃’의 박예슬 대표는 심리학과 실내건축학, 경영학을 전공했다. 심리학이 인간의 과거를 분석해 지각과 인지, 해석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실내건축학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디자인을 연구하는 분야다. 경영학은 이를 풀어낼 방법을 알려준다. 그가 상아탑에서 배운 학문의 시너지는 학교 안에 머물지 않았다. 현장에서 쓰였다. 졸업 전 스타트업을 시작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다.
“저희 팀에는 초등학교 동창도 있고 고등학교 동창도 있어요. 함께 아이템을 궁리하면서 발전시켰죠. 처음 채택된 아이디어는 ‘영업왕 유대리’였어요. 영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래처 정보를 일일이 찾아 내비게이션에 넣고 움직이는 걸 보고 만든 아이디어였어요. 엑셀로 정리해서 입력하면 그 후론 입력하지 않아도 되게끔 했죠.”
아직 학생이었던 박예슬 대표가 아이디어를 갖게 된 건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30년 넘게 영업직에 종사한 아버지에게 필요할 것 같은 서비스였다. ‘한 번에 넣고 관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하실까’라는 생각이 동기가 됐다. 그의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파급력이 컸다. 최소한의 기능만 넣고 시작한 서비스에 피드백이 왔다. ‘영업왕 유팀장’이라는 이름의 기획서에는, 지금 서비스가 가진 장점과 앞으로 개선하면 좋을 점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누군가의 필요’를 실제로 느낀 순간이었다.
“2015년에 졸업한 뒤 20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장조사를 시작했어요. 실제로 사용할 만한 분들의 반응을 봤죠. 영업사원뿐 아니라 부동산 관계자, 택배 기사 등을 관찰했어요. 이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기능을 보완했습니다. 2017년에 업그레이드 버전을 출시했어요.”
이때 바뀐 이름이 ‘워킨맵’이다. 처음 이름은 ‘인맵’이었다. 한자로 사람을 뜻하는 인(人)과 지도를 뜻하는 맵(map)을 더한 이름이었다. 사람과 장소를 연결해준다는 의미에서, 더 뾰족하게는 ‘일하는 이들을 돕는다’는 의미에 집중해 ‘워크(Work)’를 덧붙였다.
▶ 1 지난 겨울, 스키장에서 진행한 ‘솔깃 워크숍’ 현장 ⓒ박예슬
2 ‘워킨맵’을 구동하면, 텍스트가 아닌 지도로 거래처를 찾을수 있다. ⓒC영상미디어
“창업을 시작한 뒤로 한 번도 ‘언제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만둘 생각이 없었죠.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혔어요. 창업에 대한 고민은 저보다 제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하는 거 같아요. 부모님도 처음엔 걱정하셨어요. 하지만 우리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걸 지켜보시고, 실제로 아버지도 저희 서비스를 사용해보시고는 지금은 응원해주세요.”
‘솔깃’을 운영하면서 가장 ‘쫄깃’했던 순간은 2016년 겨울이었다. 일요일 저녁 8시 정도, 친구들과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박예슬 대표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모르는 이에게서 한동안 험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영문을 모르고 봉변을 당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서비스의 서버가 중단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으로 거래처를 관리하던 한 팀의 영업이 중단된 상황이었다.
“그분이 어찌나 강력하게 항의하시던지, 정말 놀랐어요. 바로 팀원들에게 연락해서 서버를 복구했죠.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굉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누군가에게는 ‘영업의 필수 도구’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실제 사용자와 강렬한(?) 만남은 ‘솔깃’의 책임감을 더 공고히 해주었다. 누군가의 비즈니스에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현재 ‘워킨맵’을 사용하는 사용자 수는 3000명 정도다. 그중 25% 정도는 하루에 10번 이상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한다. 깔아두고 하루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 앱이 수두룩한데, 워킨맵이 그만큼 사용자의 충성도와 의존도가 높은 앱이라는 증거다.
“법인을 등록하고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대한 고민도 생기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사용자들에게 좀 더 필요한 서비스를 잘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에요. 사용자 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숫자가 유의미한가도 중요한 일이거든요.”
박예슬 대표는 ‘솔깃’의 방향을 팀원들과 공유하고 의논한다. ‘솔깃’만의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혹자는 수익이 좀 더 나고 규모를 키운 뒤 문화를 고민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지금 자리 잡지 못한 문화가, 덩치가 커진 뒤 갑자기 생겨날 리 만무하다. ‘솔깃’은 솔깃의 구성원들에게 먼저 ‘솔깃한 놀이터’가 되길 바란다. 때문에 ‘솔깃한 티타임’, ‘솔깃한 금요일’ 등을 운영한다. 스타트업에 퇴근시간이란 없기 때문에, 업무 피로도가 누적되지 않도록 ‘탄력근무제’를 시행하고 딴 짓도 장려한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는 ‘퇴근’의 개념이 없더라고요. 스타트업이 다 그렇겠지만, 하나의 프로젝트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이 끝나지 않잖아요. 집에 가서도 그 생각뿐이고요. 심지어 꿈에서도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솔깃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그런 구조로 계속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놀 땐 확실하게 놀고, 일할 땐 확실하게 일하는’ 분위기를 위해서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수평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다. 누구도 눈치 주지 않고, 아무도 눈치 보지 않는다. 티타임 중에는 절대 업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대신 일상다반사를 나눈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아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나 오해의 소지를 차단할 수 있다.
“솔깃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이미지가 무엇일지를 생각해봤어요. 하루는 팀원들이 함께 ‘밤샘 워크숍’을 진행했죠. 포스트잇에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형용사를 붙여봤어요. 그렇게 압축된 단어가 ‘추진력’, ‘생존력’, ‘잠재력’이었어요. 이 세 단어를 조합하니까 잠수함이 생각났어요. 솔깃의 로고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이들은 지금도 잠수함처럼 심해를 탐험하고 있다. 앱을 넘어서 웹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사용자들이 좀 더 ‘편안하고 안정된 상황’에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이는 비단 사용자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먼저 취업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나누죠. 그런 나눔을 통해서 솔깃의 방향을 가늠해봐요. 잘못된 문화는 답습하지 말자고요.”
인터뷰 자리에 먼저 도착해 박예슬 대표가 읽고 있던 책은 <불행 피하기 기술>이었다. 책의 띠지에는 “좋은 삶을 살고 싶은가? 불행은 피하고 행복은 늘려라! 이 간단한 방법이 어려운 것은, 많은 이들이 정작 불행을 줄이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개발자의 입장보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일, 대표의 입장보다 팀원의 입장에 서보는 일, 행복을 높이기 위해 불행을 피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일, ‘솔깃’이 가진 저력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