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문제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중요한 사회 이슈다. 패션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패션과 환경이라니. 자고 일어나면 트렌드가 바뀌고 여러 SPA브랜드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옷이 쏟아지는 요즘 환경을 생각한 패션은 따뜻한 프라푸치노(Frappucino)처럼 어색한 조합이다.
물과 기름처럼 한데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제로웨이스트’를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옷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재킷을 하나 만든다고 치면 먼저 재단이 필요하다. 옷감 위에 재킷 모양의 선을 그으면 선 바깥쪽은 버려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버려지는 원단은 전체 옷감의 20%를 차지한다.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은 소재를 낭비하지 않고 디자인하는 것이 핵심이다.
요즘 대세로 떠오른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의 시작은 ‘에시컬패션(Ethical Fashion, 윤리적 패션)’이다. 에시컬패션은 노동집약적인 의류산업을 사람과 사회에 이로운 방향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에서 탄생했다. 환경에 최소한의 영향만 미치면서 옷을 생산하는 모든 방식을 일컫는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친환경 원료를 사용하거나 재생 폴리에스테르를 원단으로 만든 옷, 화학염색 과정을 거치지 않은 옷 등이 여기 포함된다. 2010년대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유럽 일대에서 시작된 윤리적 패션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제로웨이스트 디자인까지 이어졌다. 윤리적 패션이든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이든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패션 아이템을 만들자는 취지는 같다.
▶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도입한 의류브랜드‘파츠파츠’의 임선옥 디자이너 ⓒC영상미디어
우리나라 패션계에도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는 브랜드가 있다. 의류 브랜드 ‘파츠파츠’다. 파츠파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임선옥 디자이너는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파츠파츠의 시그니처로 만든 장본인이다.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은 기획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가능하다. 기존 패션계에서는 흔치 않은 생산방식이다. 임선옥 디자이너의 실험은 업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2016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중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디자이너만이 수상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지속적으로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실천한 결과 이제 파츠파츠의 컬렉션에 영감을 받은 후배 디자이너들이 속속 생기고 있다. 또 학계나 대학에서도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에 대한 내용으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구도 꾸준히 들어온다. 2015년에는 그의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새로운 소재, 생산방식으로 완성한 ‘지속가능한 패션’
파츠파츠의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이라는 정체성은 임선옥 디자이너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디자이너는 트렌드를 받아들여 해석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반복하는 직업이다. 이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평소 입는 옷을 생각해보면 계절마다 소재가 다르다. 디자이너도 계절에 맞춰 여름이면 리넨처럼 얇은 소재를, 겨울이면 모직처럼 두꺼운 소재로 옷을 만든다. 매 시즌 옷을 만들면서 다른 소재를 완벽하게 다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사계절 내내 불편함 없이 입을 수 있는 옷감을 찾고, 기본을 갖춘 디자인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디자인은 틀이 잘 갖춰지면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생긴다.
▶ 패션브랜드 파츠파츠의 2018 FW 시즌 콜렉션 ⓒ파츠파츠
파츠파츠는 옷감을 디자인할 때 소매, 옷깃 등 각 부분을 레고블록처럼 딱 맞게 그려 옷감 낭비를 최소화한다. 옷을 만드는 소재는 ‘네오프렌’ 딱 하나다. 파츠파츠에서 쓰는 네오프렌은 일반적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폴리에스터 저지 사이에 스펀지를 압착해 새로 만든 파츠파츠만의 고유한 옷감이다. 소재를 하나만 선택한 이유도 재료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다. 네오프렌을 기본으로 두께를 더하거나 얇게 만드는 방식으로 옷에 계절감을 더한다. 거기에 접착방식으로 옷을 이어 붙여 재료를 또 아낀다. 이렇게 아끼고 또 아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도 남는 원단이 있으면 가방이나 머플러 같은 패션 소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한 가지 소재만 써서 옷을 만들면 위험부담이 크진 않을까. 임선옥 디자이너는 혹여나 소비자가 느낄 수 있는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매 시즌 새로운 포인트를 만들어 디자인한다. 다양한 패턴을 활용해 옷마다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런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비자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옷은 아무리 친환경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결국은 쓰레기로 전락하고 만다.
파츠파츠가 패션업계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요건을 모두 충족했기 때문이다. 제로웨이스트라는 지속가능성으로 시장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는 전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드물다. 시작이 그랬듯 파츠파츠는 여전히 새로운 길을 향하고 있다. 크리에이터로서 지속가능한 길을 가면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그가 디자이너로서 안고 있는 가장 큰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