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리를 만드는 사람, 폴리아티스트 정지수

이근하 위클리 공감 기자 2018.10.21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청혼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지가 손가락에 들어가는 모습이 스크린을 꽉 채우고, 모든 관객이 그 장면에 집중한다. 이때 자연스레 녹아드는 소리가 있다. 어떤 소리냐고 묻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쇠고리가 살갗을 스치는 소리랄까. 자동차 소리, 동물 울음소리처럼 명료하게 이름 붙일 수 없는 소리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영화 장면에 꼭 맞는 그 소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바로 폴리아티스트 정지수 씨가 만든 효과음이다.

폴리아티스트 정지수

C영상미디어

영화에서 대사와 음악을 제외한 모든 소리를 만드는 사람을 가리켜 ‘폴리아티스트(foley artist)’라고 한다. 1930년대 미국 할리우드 효과음계 전설로 유명한 잭 폴리(Jack Foley)의 이름에서 따왔다. 잭 폴리는 발소리만으로 영화 캐릭터를 표현하는 천부적 재능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미 촬영한 영상에 소리를 입히는 행위를 처음 시도했고, 그것이 영화 효과음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면서 ‘폴리’라는 영역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폴리아티스트는 1990년대까지 ‘음향 효과맨’으로 통했고, 2000년대가 돼서야 지금의 명칭을 사용했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의 직업으로 언급되면서 부쩍 더 알려졌다.

“영화 사운드는 다이얼로그(dialogue), 사운드 이펙트(sound effect) 등으로 분류하고 이 소리들을 내는 역할을 다이얼로그 에디터, 사운드 이펙트 에디터라고 해요. 촬영 당시 녹음한 소리를 편집한다는 개념이죠. 하지만 폴리는 영상에 맞는 소리를 창조하는 작업이라 아티스트라고 해요. 저는 열 명 남짓한 국내 폴리아티스트 중 한 명이고요. 2008년 5월부터 시작했으니 꼭 10년을 넘겼네요.”

폴리아티스트로서 참여한 영화는 ‘악의 연대기’, ‘내가 살인범이다’, ‘시간위의 집’ 등 40여 편. 영화 한 편당 80%의 소리를 폴리아티스트가 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지수 씨가 재창조한 소리 개수는 셀 수 없이 많다. 촬영 현장에서는 배우가 뱉는 대사 위주로 녹음하기 때문에 그 외의 소리는 폴리아티스트의 몫이다. 이를테면 뚜껑을 여는 소리,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등 당연히 현장에서 담겼을 거라 여긴 소리마저 폴리아티스트의 손을 거쳐 다시 탄생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영화 40여 편서 ‘소리 창조’

“그게 입힌 소리였다고?” 하며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 어떻게 내는 소리인지 알수록 신기하니 말이다. 정 씨는 소리 도구를 한정짓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물체와 또 다른 물체가 결합했을 때의 소리는 직접 시도해보지 않고선 알 수가 없다. 때로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단다.

“개가 주인공인 영화를 작업한 적 있어요. 개가 산이고 들이고 뛰어다니는 장면이 수두룩하니 개 발소리가 필요했죠. 이것저것 시도했는데 결과적으로 고무장갑 끝에 클립을 붙여 바닥을 쓸어내리니 딱이더라고요. 키스신 소리를 녹음할 땐 제 팔뚝과 입술이 도구예요. 그럴 땐 문득 ‘나 지금 뭐 하냐’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

배변하는 소리를 만든 적도 있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이 대변을 누는 장면이 있는데, 배우의 상체만 카메라에 잡히기 때문에 더 실제 같은 소리가 삽입돼야 했다. 대변이 나오는 소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등 사운드만으로 장면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배우의 표정 변화에 맞춰 소리 또한 미세하게 변해야 했다. 정 씨가 고민한 끝에 찾은 해결책은 점토와 식빵, 바나나, 헤어젤, 케첩이었다. 이들 재료를 섞으니 우리가 상상하는 그 소리와 제법 흡사한 효과음으로 변신했다. 그는 “감독님이 진짜 일 본 거냐고 물으실 정도로 만족하셨던 기억이 난다”며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소리로 꼽았다.

정지수 씨가 영상 속 배우의 몸짓, 상황에 맞는 소리를 만들고 있다.

1 정지수 씨가 영상 속 배우의 몸짓, 상황에 맞는 소리를 만들고 있다.
2 소리를 만들 수 있는 각양각색 도구들이 작업실 한편을 가득 메우고 있다. ⓒC영상미디어

누군가에게 버려진 물건이라도 그의 작업실에선 소리를 만드는 자산으로 다시 태어난다. 마치 고물 창고를 연상시킬 만큼 작업실 한편이 각종 물건으로 가득 메워진 이유다. 최근에는 버려진 운동기구에 문손잡이 두 개를 달아 고철 괴물이 움직일 때 내는 소리를 표현한 일도 있다.

“옷깃 스치는 소리나 발소리와 같이 모든 영화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소리는 실제 옷이나 신발을 활용해요. 유사한 도구로 만드는 소리다 보니 특별하진 않아요. 반면 관객이 쉽게 떠올리기 힘든 것들로 만든 소리는 상대적으로 성취감이 커요.”
그렇다고 생소한 효과음을 내는 데만 몰두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놀라는 소리를 만드는 것에 한창 끌렸던 게 사실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소리를 잘 내야 다른 소리도 가능하다고 판단해서다.
더욱 실감 나는 발소리를 연구하던 중 특이한 신발을 신고 걷는 사람을 마주쳤다. 그 사람 발만 쳐다보며 따라가니 소란스러운 바깥에서도 발자국 소리만 들리더란다. 그날을 시작으로 꽤 오랜 기간 행인들의 신발 소리만 좇으며 걸었다. 신발마다, 걷는 방법마다 다른 소리에 귀 기울였고, 덕분에 이젠 배우 걸음 특징에 맞는 발소리를 그 누구보다 빠르게 녹음한다.

폴리아티스트가 등장한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시네마서비스 2 드라마 ‘또! 오해영’ 속 폴리아티스트였던 남자 주인공이 소리를 만드는 모습

1 폴리아티스트가 등장한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시네마서비스 2 드라마 ‘또! 오해영’ 속 폴리아티스트였던 남자 주인공이 소리를 만드는 모습 tvN
3 영화 ‘어린왕자’ 주인공의 직업으로 등장한 폴리아티스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외국엔 음향편집·음악믹싱상 등 있는데…”

지금이야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소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첫 작업했던 순간을 회상하면 아쉬움부터 앞선다.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비상업 영화였던 터라 갑옷 소리를 낼 만한 소재를 구해야 한다. 최대한 비슷한 복장을 입고 움직였는데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었다. 음향 믹싱 작업을 거쳐 다듬어진 소리를 입히긴 했지만, 최종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방법으로 시도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주변 소음이 녹음되면 안 되니까 에어컨도 끈 채로 작업에 집중했어요. 폴리는 아이디어 싸움이기도 한데 그땐 경험과 노하우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아쉬움은 지울 수 없지만 폴리아티스트로서 첫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랐을 때의 벅참도 잊지 못하죠.”

정지수 씨는 자신이 참여한 작품보다 다른 폴리아티스트가 작업한 영화를 더 많이 본다. 같은 소리여도 저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만큼 어떻게 빚은 소리인지, 자신이라면 어떻게 그려냈을지 등을 생각하기 위해서다.

“엔딩 크레딧이 지날 때 어떤 폴리아티스트인지 꼭 찾아봐요. 얼마 전에 폴리아티스트 모임을 만들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저도 그분들 이름만 알지 개인적인 친분은 없거든요. 서로 알고 지내면 함께 고민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돼요. 그런 점에서 보다 젊은 폴리아티스트 유입이 필요한 때라고 봐요.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수록 아이디어가 많아질 거고 젊은 친구들만이 제안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는 국내 폴리아티스트가 희소성에 비해 보수가 높지 않다고 했다. 비단 폴리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영화 스태프 전반에 해당한다고도 덧붙였다. 근무 환경 개선 속도가 영화 산업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며, 이 점이 청년들이 폴리아티스트를 꿈꾸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더불어 음향 스튜디오에 대한 편견이 새내기 폴리아티스트가 크게 늘지 못하는 데 한몫했다는 의견이다.

“음향 관련 일을 하면 매일 밤샘은 다반사일 것이라는 시선이 여전히 지배적인 것 같아요. 실상은 아닌데 말예요. 일정을 유동적으로 짤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되는 분위기입니다. 급여 만족도는 상대적인 거고요. 폴리아티스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직업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국내 폴리아티스트 전문교육·훈련기관은 없다. 이따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교육을 목적으로 진행하는 인턴 제도가 전부다. 학교 전공으로 따지면 전체적인 영화 음향을 공부할 수 있는 음향제작과가 폴리아티스트와 밀접하다.

“음향제작과를 활성화하는 대학이 늘고 있어요. 굉장히 반가운 일이죠. 물론 폴리만 특정해서 가르치는 건 아니고 소리나 음향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배우는 거죠. 완벽하진 않아도 그런 교육과정을 통해 폴리아티스트로서 자질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교육기관 못지않게 사회적 관심도 중요하다. 몇 년 전까지 국내 영화제에 음향상이 별도로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기술상으로 통합됐다. 이에 대해 정 씨는 “외국엔 음향 편집상, 음악 믹싱상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이 분야 저변이 넓은 편”이라며 “우리나라도 그런 부분이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폴리아티스트로서 지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배경을 물었다.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은 건 영화와 소리만이 줄 수 있는 매력 때문이에요. 영화의 매력은 대중이 알고 있잖아요? 그 매력을 만드는 과정에 내가 참여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단순히 영상에 맞는 소리가 아닌, 영상의 전달력을 극대화하는 소리를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폴리아티스트, 어떻게 준비하나

많은 사람이 폴리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이 영역의 입지가 탄탄한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폴리아티스트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도 자격증도 없다. 주로 음향이나 영화 사운드를 전공한 사람들이 경험을 쌓은 후 폴리아티스트가 된다.

일상의 여러 소리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습관이 필요한 직종이다. 상황에 맞는 소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배우의 동작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선 배우의 동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감각이나 행동 반응력을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소리를 창조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한 만큼 상상력과 창의력도 요구된다.

자료│고용노동부 워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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