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능라도 경기장 공연을 보면서 북한 디자인의 신선함(?)을 또 한번 느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경기장에서 카드 섹션을 일사불란하게 하는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카드 섹션은 한국에서도 예전에 흔히 하던 것이었다. 거대 집단이 하는 그래픽 공연이라고 할 수 있는 카드 섹션은 왠지 전체주의 사회와 어울리는 거 같다. 그래서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남한에서는 사라졌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런 종류의 선동적인 구경거리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이어지고 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이제 수명을 다한 거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을 활용한 그래픽디자인은 촌스러워 보인다. 이건 내가 초등학생 때 그린 반공 포스터랑 어쩐지 비슷한 양식 같다. 그런데 왜 신선해 보이는 걸까? 그것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래서 잊힌 양식이기 때문이다.
▶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카드 섹션 장면. 매우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와 글씨체로 디자인되었다. ⓒ김신
▶ 1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영국 런던의 하우스 오브 일러스트레이션 전시장에서 ‘북한의 일상 그래픽(Made in North Korea: Everyday Graphics from the DPRK)’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2 파이돈에서 출간한 <조선(Made in North Korea: Graphics From Everyday Life in the DPRK)> 표지. 이 책은 북한을 100여 차례 방문한 니콜라스 보너가 북한 컬렉션을 수록했다. 3 비교적 최근인 2008년에 제작된 <전국근로자예술축전> 포스터. 그래픽의 스타일, 글씨체가 프로파간다 포스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서 변화한 것이 별로 없다. ⓒ김신
북한 디자인에 대해 신선함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 봄에는 런던의 한 전시장에서 ‘북한의 일상 그래픽(Made in North Korea: Everyday Graphics from the DPRK)’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또 아트북 전문 출판사인 파이돈에서도 북한의 디자인을 소개한 <조선(Made in North Korea: Graphics From Everyday Life in the DPRK)>(니콜라스 보너 지음)을 출간했다. 이 책은 지난 4월에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의 여파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어 공급량이 딸릴 정도였다. 그들이 전시회와 책에서 본 북한 디자인은 지역적으로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 시대적으로는 과거 냉전시대에 볼 수 있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강렬하고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그래픽들이 여전히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능라도 경기장의 카드 섹션에서도 그 양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원색 위주의 색채, 붓글씨체, 꽃과 불꽃 같은 형상에 대한 애착 같은 것들 말이다.
왜 북한의 그래픽디자인은 그토록 선명하게 선동적일까? 그건 북한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이 ‘목적을 위한 철저한 봉사’에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다루는 시각디자인을 생각해보자. 당은 인민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추호의 망설임이나 모호함이 없이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은 직설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쉽고 빠르고 분명하다. 김정일은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종자론’이라는 예술 이론을 북한 예술가들에게 제시했다. 혈통이나 씨앗을 뜻하는 바로 그 종자다. 예술에서 갑자기 웬 종자? 김정일의 종자론에서 종자는 본질적인 것을 말한다. 그 본질적인 것, 주제가 제대로 잡혔느냐, 또 제대로 표현되었느냐가 예술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기자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용어로 일본어 ‘야마’와 비슷하다. 편집장이 기자에게 “이 기사는 야마가 없어”라고 말하면, 그건 핵심이 없다는 뜻이다. 야마가 있으려면, 북한식으로 표현해서 종자를 제대로 잡으려면, 화면 안에 있는 모든 구성 요소들을 하나의 주제에 철저히 종속시키면 된다. 그러면 종자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빠르고 쉽고 자명해진다.
이것을 알면 북한 그래픽디자인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글자는 크고 선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주제가 되는 인물은 중앙에 크게 배치한다. 그 인물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므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추상적인 형태는 인정받을 수 없다. 추상은 분명하지 않고 애매모호하며 다양한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북한 포스터에는 기하학적이거나 유기적인 도형이 나오지 않는다. 주로 사람, 꽃, 식물, 건물, 깃발, 총, 탱크 같은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다. 그리하여 화려하고 드라마틱하고 구상적이며, 소란스러운 그래픽디자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북한 미술은 어찌 보면 고대 이집트 미술이나 중세 기독교 미술과 공통점이 있다. 파라오나 신을 중심에 두는 이 두 미술 양식은 어떤 전형성으로 나아간다. 전형적인 신의 모습, 성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그것에서 변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종자’이고 ‘야마’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미술은 수천 년 동안 변화하지 않았다. 중세 미술 역시 천 년 동안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그림은 무수히 복제되고 반복된다. 그것을 ‘이콘icon’이라고 한다. 이런 양식에서는 인간적인 관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관점을 허락하는 순간 전형성과 보편성은 무너지고 우연성과 개별성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와 디자이너 각각의 예술적 가능성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에 따라 주제는 약화된다. 북한 회화와 포스터에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이 손을 뻗어서 어딘가를 가리키는 그림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체 역시도 붓글씨체, 삐침이 없는 굵은 돋움체(예전에는 고딕체라고 했다) 등 몇 가지로 한정된다. 무엇보다 북한 디자인에서 개인 디자이너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치 이집트 미술과 중세 미술에서 개인 예술가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이 너무나 오래전의 것이고, 또한 잊힌 데다가 북한 특유의 민족주의적인 성향까지 섞이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독특하고 신선해 보일 뿐만 아니라 재미있으며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북한에도 조금씩 침투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가 변화하면, 철저히 통제되는 북한의 양식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래돼서 신선해 보이는 이 양식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