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있던 건물이 사라지기도 하고 비어 있던 공터에는 고층 건물이 들어서기도 한다.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하는 도시에도 시간이 멈춘 곳이 있다. 1970~1980년대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했던 다방이다. 친구나 연인을 다방에서 만나는 게 당연했던 때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사랑을 꽃피웠을 뿐 아니라 많은 문학작품과 음악이 탄생하기도 했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 밀려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다방이 의외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진 세월을 견딘 다방은 현재 프랜차이즈 카페 못지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추석 연휴 전후로 ‘다방’을 찾아 옛 추억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고 재미도 있어 보인다.
▶ 왼쪽부터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독수리다방, 대구 중구 소재 미도다방
세월의 흐름에 밀려 폐업했다 다시 돌아온 곳도 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앞에 있는 ‘독수리다방’이다. 신촌의 명물 독수리다방은 1971년 음악다방으로 문을 열었다. 그 시절 다방이 으레 그러하듯 독수리다방도 많은 청춘이 추억을 아로새긴 사랑방이었다. 휴대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다방 문 앞에 놓인 메모판에는 친구에게 전하는 쪽지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많은 청춘의 연락책을 담당했던 독수리다방은 찬란한 전성기를 뒤로하고 2005년 폐업하고 만다. 그리고 8년 후 독수리다방의 원주인 김정희 씨의 손자 손영득 씨가 2013년 할머니의 뒤를 이어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장했다. 새로 문을 연 독수리다방은 도서관에 가까운 모습이다. 매장에 들어서면 책장이 먼저 눈에 띈다. 1970년대 다방 안을 차지했던 푹신한 레자소파 대신에 고풍스러운 원목가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손님 대부분은 혼자 또는 친구와 함께 와서 공부를 하는 대학생이다. 젊은 날 추억을 되짚어보려 찾은 중장년층 손님도 있다. 독수리다방은 낮보다 밤에 오는 것이 더 좋다. 어둠이 내려앉고 거리에 조명이 켜지면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커피 맛만큼이나 훌륭하다.
▶ 왼쪽부터 서울 동작구의 터방내,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림다방, 부산 영도구 양다방
다방을 논할 때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을 빼놓을 수 없다. 1956년 신선희 씨가 처음 문을 연 학림다방은 벌써 환갑이 넘었다. 2014년에는 서울특별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 건물 전체가 영구보존구역이 됐다. 다방 이름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축제였던 학림제에서 따왔고 현재 1987년부터 4대 사장을 맡은 이충렬 씨가 운영하고 있다. 학림다방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아지트로 쓰던 곳이다. 별칭이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일 정도다. 소설가 이청준, 시인 김지하, 시인 천상병 등이 이곳을 거쳐 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게 내부는 1956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 거의 변함이 없다. 고풍스럽고 오래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중장년층부터 노년층까지 젊은 날의 향수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방문한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면서 조금씩 부활의 조짐이 보이더니 그때 그 시절처럼 젊은 층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창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기에는 다방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시간이 멈춘 곳
학림다방은 먹거리가 다양하다. 커피와 각종 차는 물론 조각케이크와 파르페, 아이스크림, 심지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술도 있다. 무엇보다 대학로에서 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직접 로스팅해 블렌딩해서 만드는 커피는 원두를 많이 사용해 맛과 향이 진하고 그윽하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마셨던 믹스커피를 생각하고 방문한다면 한층 짙어진 커피 맛에 놀랄 수도 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앞에도 1983년부터 한자리를 오래 지켜온 다방 ‘터방내’가 있다. 이곳은 지금도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 학교 앞 명소.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낡은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터방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벽돌과 아치형 칸막이가 아늑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마치 굴 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이다. 벽에는 낙서가 한가득이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낙서 위에 낙서를 덧칠한 흔적이 빼곡하니 뒤덮였다. 커피 값은 더 놀랍다. 대부분 메뉴가 3000원대다. 커피를 만드는 주방에는 지금은 보기 힘든 사이폰 기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문받는 것도 계산하는 방식도 옛날 방식을 고수한다.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사장이 직접 주문을 받고, 나갈 때 계산을 한다. 커피 위에 각설탕을 올린 수저를 놓고 위스키로 불을 내는 ‘카페로얄’, 체리맛 음료 위에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파르페’ 같은 추억의 메뉴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근대문화 골목’으로 유명한 대구 중구 진골목길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미도다방’이 있다. 미도다방은 여전히 대구 어르신들의 핫플레이스다. 오고 가는 많은 손님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서울에 있는 다방에 젊은 손님이 꽤 있는 것과는 다른 풍경이다. 다방에 들어서면 한약 냄새가 솔솔 난다. 미도다방의 명물 쌍화차 냄새다. 붉은 레자소파 위에 알록달록한 오색 방석이 있다. 자리에 앉아 주문하면 전병과 ‘웨하스’가 담긴 주전부리가 나온다. 미도다방에 오면 꼭 쌍화차를 마셔보자. 쌉싸름한 계피 향과 고소한 견과류가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다. 참고로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워서 마시고 싶다면 주문할 때 미리 말해야 한다.
부산 영도구에는 ‘양다방’이 있다. 양다방은 1970년대 부산 영도를 오고 가는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인생 애환을 나눴던 아지트였다. 가게는 외·내관 모두 1970년대에서 멈춰 있다. 노란색, 붉은색 알록달록한 벽지에 민트색 찬장이 자리하고 있다. 메뉴는 칡즙, 생강차, 생과일주스, 유자차, 쌍화차, 마즙이 있다. 벽에 적힌 메뉴판에는 커피가 없지만 팔고 있다. 양다방의 인기 메뉴 역시 쌍화차다. 쌍화차를 시키면 노른자를 터뜨리지 말고 한입에 먹으라는 조언도 따라온다. 쌍화차를 마시면서 촌스럽고 과한 인테리어가 다시 눈에 띈다. 쌍화차가 남기는 여운만큼 강렬한 기억이 새로운 추억으로 가슴에 진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