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갖고 있는 이야기는 천차만별이지만 공유하는 감정은 비슷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느끼는 즐거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느끼는 슬픔 같은 감정은 우리 모두 겪어봤으므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헤아리기 힘든 감정도 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온 국민 앞에 토로했을 때,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던 사람들은 할머니들이 겪은 일이 그들의 일생에 어떤 고통과 슬픔을 안겼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경신 작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소재 역사책방에는 이경신 작가의 <못다 핀 꽃> 출간을 기념해 작가가 책에 그린 삽화를 전시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한 미술수업 이야기를 책으로 낸 이경신 작가 ⓒC영상미디어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던 해, 이 작가는 20대 초반의 어리고 여린 대학생이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가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김학순 할머니의 목소리는 2년 후 다시 이 작가를 흔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한글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들었다.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나눔의 집’으로 찾아갔다. 1993년 2월 찬바람이 부는 계절 스물다섯 손녀뻘인 선생과 나이 지긋한 학생인 할머니들의 인연이 시작됐다.
“처음 미술 수업을 시작할 때 할머니들은 그림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나눔의 집에 계시는 일곱 분 중에 적어도 다섯 분은 하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이 나이에 무슨 그림이냐’며 나서는 분이 없었어요.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제가 불쌍했는지 강덕경, 김순덕, 이용녀 할머니 세 분이 슬금슬금 거실로 나와 자리를 잡으셨죠. 손님 대접하러 나온 세 분과 함께 선을 그리면서 미술 수업이 조금씩 진행됐어요.”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나눔의 집 미술 수업에는 고정 수강생이 2명, 반 고정으로 참석하는 수강생이 2명이었다. 이 작가를 따라 빠지지 않고 수업에 나온 강덕경, 김순덕 할머니는 작품도 많이 남겼다. ‘빼앗긴 순정’, ‘배를 따는 일본군’, ‘못다 핀 꽃’ 같은 잘 알려진 그림이 두 할머니가 그린 작품이다. 이용녀, 이용수 할머니는 나눔의 집과 다른 곳을 오가며 생활해 매주 참석하지 못했다. 두 할머니들도 고정 수강생들 못지않은 작품을 남겼다. ‘자화상’, ‘내 마음 별과 같이’, ‘붉은 입술’ 같은 작품이다.
이 작가가 가까이서 본 할머니들은 으레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할머니들과 똑같았다. 이 작가에게 참한 총각을 소개해주겠다며 중매쟁이로 나서기도 하고, 누가 동네에 쓰다 버린 물건을 보면 아직 물건이 쓸 만하다며 주워다 썼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시샘도 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고 함께 밥을 지어 먹는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네 할머니였다.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가장 사교성이 뛰어난 반면 그림그리기는 어려워했던 김순덕 할머니, 자존심이 세 처음에는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미술 수업에 제일 모범생이었던 강덕경 할머니, 미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흥미는 없었던 이용녀 할머니, 활발하고 솔직한 성격을 따라 그림도 시원시원하게 그렸던 이용수 할머니.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뭔가가 필요해 보였다.
이 작가는 할머니들이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할퀴고 간 상처를 안고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감정의 찌꺼기를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그림이길 바랐다. 하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할머니들이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들이 마음 가는 대로 붓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다. 할머니들은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 본 이를 어미라고 여기고 따르는 것처럼 어린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특히 강덕경 할머니는 성장 속도가 빨랐다. 데생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었고 표현력도 풍성해졌다. 하지만 강덕경 할머니도 김순덕 할머니도 이 작가가 바라는 그림을 그리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다 이용수 할머니가 물꼬를 텄다.
“그날 느낀 기분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수업이었어요. 그 전에는 사물을 따라 그리는 데생만 하던 할머니들이 수업 내용이 달라지니까 표현하기 어려워하셨죠. 그때 이용수 할머니가 빨강, 노랑, 파란 선들이 칡넝쿨처럼 얽힌 그림 ‘복잡한 세상살이’, 화면 왼쪽에는 작은 타원, 오른쪽에는 좀 더 큰 타원 안에 붉은 점으로 격하게 점을 찍은 ‘청춘’, 붉은 물감으로 입술을 크게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의 선을 그린 ‘붉은 입술’을 하루 만에 그려냈어요. 이용수 할머니에게 칭찬을 엄청 했더니 파급 효과가 어마어마했어요. 이용수 할머니가 해내니까 다른 할머니들도 선의의 경쟁이 붙은 거죠. 그때부터 할머니들이 자기 안에 있던 감정을 조금씩 꺼내면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가슴에 품은 상처를 그림으로 풀어내다
심상을 표현하는 그림은 모범생인 강덕경 할머니보다 김순덕 할머니가 먼저 그렸다. 빨간 물감, 파란 물감으로 구불구불한 선을 몇 개 그린 그림의 제목은 ‘일편단심’. 이 작가는 ‘일편단심’을 그릴 때 김순덕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전과는 다르게 작품에 무섭게 몰입했다고 말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다음 “내 젊은 시절에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일생을 일편단심으로 열심히 산 것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 1 목련 자수 위에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그린 김순덕 할머니의 대표작 ‘못다 핀 꽃’ ⓒ나눔의 집
2 일본군에 끌려갔을 당시의 모습을 새롭게 구상해 그린 강덕경 할머니의 대표작 ‘빼앗긴 순정’ ⓒ나눔의 집
강덕경 할머니는 심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기까지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 걸린 만큼 할머니가 내놓은 작품은 충격적이었다. 커다란 나무 기둥 안에 일본 군복을 입은 남자가 손을 뻗고 있다. 사방으로 뻗은 나무뿌리 위에는 발가벗은 소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뿌리 아래에는 일본군에 끌려간 수많은 소녀를 상징하는 해골이 있는 그림, ‘빼앗긴 순정’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당신이 일본군에 끌려가던 50년 전을 화폭에 그렸다. 할머니를 끌고 간 ‘고바야시 다테오’와 성폭행을 당했을 때 겪은 처참함을 담은 작품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두 할머니가 심상을 표현한 작품을 그린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저마다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듯 그림을 그렸다. 할머니들은 이 작가가 나눔의 집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김순덕 할머니는 머릿속에 구상은 다 됐는데 손이 따라주질 않아 이 작가가 올 때마다 그림을 표현하는 방법을 물었다. 강덕경 할머니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도화지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가 미술 수업 시간에 보여줘 이 작가를 놀라게 했다.
“하루는 김순덕 할머니가 밖에서 자수를 주워왔어요. 그걸 깨끗하게 빨아서 액자에 걸고 싶은데 표구사에 가니까 10만 원이 넘는 돈을 달라고 했대요. 비싸서 액자는 못하겠고 이 아까운 걸 어쩌느냐며 안타까워하시기에 거기다가 그림을 그리자고 했어요. 하얀 목련 자수 위에 할머니의 어릴 적 모습을 그렸어요. 꽃망울을 터뜨리기 전인 목련이 꼭 당신의 신세 같다 하시면서요. 김순덕 할머니의 대표작 ‘못다 핀 꽃’이 그렇게 탄생했죠.”
▶ 3 배 열매 안에 한복을 입은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일본군의 손을 그려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강덕경 할머니의 ‘배를 따는 일본군’
4 김순덕 할머니가 처음 스스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그때 그곳에서’
5 강덕경 할머니가 벚나무 기둥에 히로히토 일왕으로 연상되는 남자를 묶어놓고 총을 겨냥한 손을 그린 ‘책임자
를 처벌하라’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비둘기의 모습에서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나눔의 집
강덕경 할머니 역시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배 열매 안에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바깥에는 배를 따는 일본군의 손을 그려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그림 ‘배를 따는 일본군’, 일본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민간 모금 형태로 배상하겠다는 뉴스를 보고 분노에 휩싸여 그린 그림 ‘책임자를 처벌하라’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림으로 조금씩 한을 풀던 강덕경 할머니는 1995년 폐암 선고를 받았다. 곧장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1997년 2월 숨을 거뒀다. 강덕경 할머니의 죽음으로 이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 나눔의 집에서 가장 어리기도 했고 매주 수요집회에 나갈 때마다 “이백 살까지 살아서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누누이 말할 만큼 의지가 굳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이 작가에게 남긴 말이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하루빨리 죽는 게 소원이라던 분이 2년만 더 살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제 그림을 그리면서 막 재밌게 살기 시작했는데 2년만 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면서요. 저에게는 정말 고마운 말이었죠. 할머니들은 세련되지 못해서 예쁜 말, 고마운 말을 잘 못하세요. 표정에 행동에 감정을 드러내는 게 전부예요. 2년만 더 살고 싶다는 말이 그림을 가르쳐줘서 고맙다는 말보다 더 크게 와 닿았어요. 할머니가 10년만 더 사셨더라면 세상을 바꿀 만한 작품을 턱턱 내놓으셨을 거예요. 할머니가 그림을 배운 만 4년 동안 내놓은 작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할머니들과 함께한 만 4년의 추억을 간직한 채 세월을 보낸 이 작가는 2015년 일본정부가 공식 사과와 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위안부 문제를 돈으로 배상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한일위안부피해자 합의 문제’ 소식을 듣고 할머니들이 용기로 고통을 이겨낸 이야기를 널리 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을 내기로 하고 기억에 묻었던 할머니들의 그림을 꺼냈을 때 신기하게도 그림을 그릴 당시 했던 대화와 상황들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 작가가 쓴 <못다 핀 꽃>은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작가와 함께 미술 수업을 했던 할머니 네 분 중 이제 생존자는 이용수 할머니 한 분뿐이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 238명 중 이용수 할머니를 포함해 27명이 남았다. 더 이상 헛되이 흘려보낼 시간이 없다.
“책을 쓸 때만 해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잊지 않고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런데 책을 내고 나니 다른 꿈이 또 생겼어요. <못다 핀 꽃>이 일본에 번역돼 많은 일본인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거예요. 일본에 있는 일반 대중에게 이 책이 알려져서 일본인들도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