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을 웃고 울린 16일간의 스포츠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때론 기쁨을, 때론 아쉬움을 전하던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지난 9월 2일(이하 현지 시간)을 마지막으로 스포츠 대회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우리 선수들은 어떤 종목에서 어떻게 경기를 펼쳤을까. 당초 우승을 확신했던 일부 종목에서 예상 밖의 결과를 맞아들이기도 했지만 신예 선수 등장, 비인기 종목의 선전 등 다음 아시안게임을 기대할 이유가 생겼다.
8월 2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어터 가루다는 남자 카바디 대표팀의 눈물과 땀으로 가득했다. 결승에서 이란의 승리로 끝난 뒤 한국 대표팀 주장 이장군은 동료들에게 안겨 눈물을 펑펑 쏟았다. 코앞에서 금메달을 놓친 데 대한 아쉬움과 부상 입은 동료들을 향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바디’라는 종목은 일반 대중에게 생소한 만큼 선수들은 전용구장조차 없는 환경에서 훈련해왔다. 대학을 중심으로 팀이 꾸려졌지만 동호회처럼 운영되는 게 주였다. 대한카바디협회는 2007년에서야 만들어졌고, 대한체육회 준가맹단체라는 이유로 선수단복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 남자 카바디가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조별리그에서 카바디 종주국인 인도의 아시안게임 사상 첫 패배를 이끌어내면서 처음 아시안게임 결승까지 올라섰다. 우리 팀은 불모지에서 오직 열정으로 은메달을 일궈냈다. 1등 이상으로 값진 결과라고 평가받는 건 이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자 카바디 대표팀의 성장세는 꾸준했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 카바디 종목에 처음 출전해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첫 동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2016년 인도에서 열린 카바디 월드컵 개막전에선 인도를 꺾기도 했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저력을 한 번 더 입증한 셈이 됐다.
▶ 8월 28일 여자 트랙사이클 단체 추발에서 금메달을 따낸 한국 선수들이 메달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깨부순 건 트랙사이클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 트랙사이클 단체 추발 대표팀은 8월 28일 중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단체 추발은 4명이 팀을 이뤄 4km를 달리면서 반대편에서 출발한 상대팀을 추월하면 승리하는 경기다. 4명 중 세 번째로 빠른 선수의 앞바퀴가 결승선에 닿는 순간이 공식 기록이다. 대표팀은 3000m를 지나기도 전에 중국을 추월 아웃시키며 금메달을 확정지었다.
추월하면 승부가 끝나는 경기이지만 우리 대표팀은 레이스를 이어갔다. 금메달과 관계없이 신기록을 세우겠다는 목표가 있어서였다. 끝까지 달린 선수들의 기록은 4분23초652. 아시안게임 신기록이다. 대표팀은 예선에서 세운 대회 신기록(4분24초796)을 하루 만에 단축했다. 더불어 이날 승리로 나아름은 한국 대표팀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첫 3관왕에 이름을 올렸다. 나아름은 앞서 도로 사이클 종목인 개인도로와 도로독주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트랙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정구, 긴 침묵 깬 금빛 소식
아시안게임 특급 효자 종목임에도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종목, 정구는 이번에도 금빛 사냥에 성공했다. 소프트 테니스(Soft Tennis)라고도 불리는 정구는 영어 표기에서 보듯 테니스에서 파생된 스포츠다. 말랑말랑한 흰 고무공과 보다 가벼운 라켓을 쓴다.
우리나라는 2010년 광저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에서 이요한, 김형준이 각각 남자 정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가져왔고 올해 대회에선 김진웅이 해냈다. 김진웅은 8월 29일 단식 8강전을 시작으로 준준결승에서 북한 리충일을, 준결승에서 김동훈을 물리치고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홈 팬들의 열띤 응원을 등에 업은 인도네시아의 알렉산더 엘버트 시였다. 김진웅은 상대 선수의 홈 어드밴티지에 추격을 당하는 듯했으나 우승은 그의 몫이었다.
김진웅은 우승과 동시에 병역특례 혜택도 받게 됐다. 9월 19일 군 입대가 예정돼 있던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울 터. 정구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기 때문에 아시안게임이 병역 혜택의 유일한 기회다. 국군체육부대 입대 대상 종목도 아니라서 이번 금메달이 아니었다면 김진웅은 입대와 함께 사실상 은퇴의 길에 접어들어야 했다. 이제 김진웅은 병역 걱정 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면 된다.
▶ 1 여서정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32년 만에 여자 기계체조 금메달이자 여자 도마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2 8월 24일 남자 카바디 결승에서 한국 이장군이 이란 선수를 공격하고 있다. ⓒ연합
오랜 기간 금빛 소식이 뜸했던 종목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여자 기계체조 도마 금메달리스트 여서정이 대표적이다. 여서정은 도마 결승에서 1·2차 시기 평균 14.387점을 기록,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1986년 서울 대회에서 서연희, 서선앵이 여자 기계체조 금메달을 처음 따낸 이후 32년 만에 금맥을 이은 것이다. 여자 도마에서는 사상 최초의 금메달이다.
여서정의 금메달은 ‘부전여전’이라는 남다른 의미도 갖는다. 여서정은 1994년, 19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도마의 달인’ 여홍철 전 국가대표의 딸로도 유명하다. 여홍철은 TV 중계 해설위원으로 딸의 경기를 지켜봤다. 여서정의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여홍철은 떨리는 목소리로 기쁨을 전했다.
여자 육상 100m 허들 챔피언 정혜림은 8년 만에 한국 육상에 금메달을 안겼다. 정혜림은 8월 26일 치러진 결선에서 안정적인 레이스로 10개 허들을 제일 빨리 넘는 기량을 뽐냈다. 특히 이번 금메달은 정혜림에게 보다 값진 결과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예선 탈락에 이어 4년 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마지막 허들에 걸려 4위에 머물렀다. 고된 기다림은 아시아 허들 여제로 이끌었다.
김서영은 두 대회 연속 ‘노 골드’가 될 뻔했던 한국 수영을 구해냈다. 8월 21일 여자 개인혼영 4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그는 24일 개인혼영 200m 결승에선 금메달을 손에 쥐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박태환의 3관왕, 정다래의 여자 평영 200m 금메달 이후 8년 만에 나온 한국 수영의 아시안 챔피언이었다. 개인혼영 금메달로 따지면 무려 36년 만이다.
▶ 1 은주원이 8월 29일 남자 스케이트보드 스트리트 결선에서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2 8월 29일 치러진 남자 소프트 테니스 단식 한국 대 인도네시아 경기에서 공격에 한창인 김진웅 선수 ⓒ연합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치러진 종목에선 우리 선수들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었다. 한재진은 8월 29일 스케이트보드 남자 파크 부문 결선에서 66.33점을 기록해 4위에 올랐다. 파크 종목은 반원통형 구조물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연기를 펼쳐야 한다. 비록 이번 대회에선 메달 진입에 실패했지만 첫 종목이니만큼 향후 메달 가능성을 점쳐볼 순 있다.
신설 종목서 가능성 확인
같은 날 은주원은 스케이트보드 남자 스트리트 부문 동메달을 획득했다. 스트리트 종목은 계단과 난간, 레일, 경사면 등 다양한 구조물 안에서 기술을 펼쳐 심판들의 채점으로 순위를 정한다. 총 일곱 차례 시기에서 성적인 나쁜 3개를 제외한 4번의 점수를 합산한 것이 최종 득점이다. 결선 현장은 극적이었다. 마지막 시기를 앞둔 은주원은 결선 진출자 8명 중 7위, 3위 선수와는 6.9점의 격차였다. 메달권을 기대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은주원이 마지막으로 시도한 백사이드 360도 립슬라이드 기술이 제대로 적용되면서 무려 8.6점을 받아 순식간에 3위로 뛰어올랐다.
한국 스케이트보드 대표팀은 촌외 훈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케이트보드가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탓에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등에 온전한 시설이 준비되지 않아서였다. 그럼에도 우리 선수들은 3, 4위를 기록하며 미래를 밝혔다.
태극전사들은 또 다른 첫 정식종목 스포츠클라이밍에서도 역량을 자랑했다. 사솔과 김자인이 여자 스포츠클라이밍 콤바인의 은메달, 동메달을 얻었다. 스포츠클라이밍 콤바인은 스피드(빨리 오르기), 볼더링(안전장비 없이 오르기), 리드(난이도) 경기로 구성된다. 사솔은 세 종목 합계 점수에서 일본의 노구치 아키요와 같은 12점을 냈으나, 동점일 경우 세부 종목에서 앞선 종목 수가 많은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규정에 따라 금메달을 넘겨줬다. 스포츠클라이밍 금메달을 향한 갈증은 남자 콤바인의 천종원이 해소했다. 천종원은 스피드 2위, 볼더링 1위, 리드 3위의 성적으로 총점 6점을 기록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궁 대표팀은 기쁨보다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체 금메달 8개 중 절반을 따냈음에도 국민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성적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김성훈 양궁 대표팀 총감독은 8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아쉽고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가장 맞을 것 같다”며 “국민의 염원에 모든 것을 보답해야 했는데 만족할 만한 성적을 못 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100개가 걸리면 100개 다 따고 싶은 게 욕심”이라며 “모자란 부분은 더 준비해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양궁 대표팀은 금메달 4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메달 개수로만 따지면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지만, 양궁 세계 최강국인 우리나라에게 금메달은 본전이고 은메달만 따도 실패한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대표팀은 앞으로도 정상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땀을 쏟을 것을 약속했다.
▶ 남북단일팀 여자 카누 용선 500m 선수들이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
시상대 위로 한반도기가 펄럭이고 ‘아리랑’이 울려 퍼진 순간도 있었다. 여자 카누 용선 남북단일팀이 8월 26일 500m 결선에서 우승, 국제종합스포츠대회 첫 메달의 쾌거를 이뤄냈다. 용선은 12명이 한배를 타고 속도를 겨루는 만큼 선수들의 탄탄한 조직력이 필수다. 이를 위해 2년 이상의 훈련을 해야 하지만 단일팀은 지난 7월 말에야 처음 만나 3주 남짓 합동훈련을 진행했다. 금메달은 힘과 기량을 떠나 서로 다른 환경의 선수들이 만나 한마음으로 빚어낸 기적의 결과물이다. 이 밖에도 남북단일팀은 여자 카누 용선 250m 동메달, 남자 카누 용선 1000m 동메달을 수확하는 등 맹활약했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