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살던 40대 부부는 남편의 정년퇴직을 10년 앞두고 정읍으로 옮겨왔다. 남들은 ‘귀농’이라고 하는데, 조금자 대표에게는 오랜 소망의 실현이었다. 남편은 정읍에서 고등학교 생물 교사로 재직했다. 그리고 퇴임한 후에는 아이들이 자연과 동식물을 마음껏 체험하며 즐길 수 있는 농원을 만들고 싶었다. 5000평(1만 6528㎡) 농지에 세운 ‘맑은샘자연교육농원’의 시작이었다. 내 땅이 생기니 모든 게 재밌었다. 채소를 키우는 것도 재미있고, 잡초를 뽑는 것도 재밌었다. 농원의 방향이 바뀐 건 우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해 서울로 진학했다. 텃밭에서 손수 기른 채소를 정성껏 포장해 서울로 보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잘 먹지 않았고, 냉장고에는 시들어가는 채소들이 쌓여갔다. 아이들은 “채소가 좋은 건 알겠는데 먹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매일 가서 챙겨줄 수도 없고 애가 탔다. ‘어떻게 하면 간편하게 채소를 먹게 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우엉을 말린 다음 잘게 썰어 밥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말린 우엉은 한약 냄새가 나고 딱딱하다고 했다. 찌기도 해보고, 데치기도 하며 여러 방법을 써보았다. 그러다 채소를 넣은 잡곡밥을 생각하게 됐다.
▶ 전업주부에서 ‘채소 전문가’로 성공한 조금자 대표 ⓒ맑은샘자연교육농원
조금자 대표는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에서 농업 교육을 받고 있었다. 교육을 받으면서 채소마다 건조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무는 1톤을 말리면 40kg으로 줄어든다. 수분이 많아서다. 호박은 그냥 말리면 진액이 된다. 감자는 잘못 말리면 갈변한다. 채소끼리 맞는 궁합도 있었다. 각 채소의 특성을 알고 나자 문득 ‘채소를 넣은 밥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에 넣으면 굳이 채소를 챙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먹게 된다. 2년간 480시간의 교육을 받았고, 3년의 연구 끝에 무, 호박, 감자, 당근, 표고버섯, 고구마, 비트, 강황을 넣은 ‘조금자 채소잡곡’이 탄생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채소의 풋내를 잡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채소를 먹지 않는 큰 이유는 ‘냄새’다. 이 냄새를 없애는 게 관건이었다. 바삭하게 말린 채소잡곡은 따로 불릴 필요 없이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만 누르면 된다. 아홉 가지 채소를 건조해 잘게 다져 넣어 밥뿐 아니라 죽과 찌개에도 넣을 수 있다. 특히 이유식을 만드는 아기 엄마들에게 유용했다. 1인, 2인 가구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채소를 먹지 않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다. 아이디어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전라북도 농가공 식품 아이디어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식품제조업을 서비스 사업자로 전환해 농업회사법인인 유한회사 ‘맑은샘자연교육농원’을 등록했다. 조금자 대표는 2014년 상금 1억 원을 종잣돈 삼아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맑은샘자연농원은 제품을 만드는 생산지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조금자 대표는 ‘제품만 잘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 쌀과 함께 넣으면 채소밥이 되는 ‘채소잡곡’ ⓒ맑은샘자연교육농원
“사업은 농사랑 다르더라고요. 대상까지 받았으니 이제 잘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판로를 열 수 있을까 매일 고민했죠.”
여덟 가지 채소를 넣은 채소밥
채소잡곡의 재고가 쌓여갔다. 빚도 늘었다. ‘평생 빚을 갚으며 살아야겠구나’ 싶어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부터 농식품 박람회를 찾아다녔다. ‘채소잡곡’을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2015년 6차 산업 가공상품 경진대회’ 우수상을 수상했다.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KBS ‘한국인의 밥상’에 출연한 데 이어, ‘6시 내고향’에서도 채소잡곡을 소개했다. 채소잡곡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채소차와 채소수도 개발했다.
“채소 하나하나를 특성에 맞게 건조한 뒤 덖으면 열세 가지 채소를 한 잔에 즐길 수 있는 채소수가 됩니다. 숭늉처럼 구수하고 진한 맛이 나서 차로도 마실 수 있고요. 찌개나 국을 끓일 때 간편하게 육수를 만들 수도 있어요.”
티백에 담은 채소차는 찬물에도 잘 우러난다. 육수를 낼 때도 1.5L 분량에 티백 하나 정도 넣으면 된다. 그즈음 ‘전라북도 창업 공모전’에서 ‘하루채소’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농촌진흥청에서 농촌교육농장 품질 인증도 해주었다. 채소잡곡에 채소차까지 생산하려니 농장의 규모가 작았다. 2014년 조금자 대표는 공장을 지었다. 대지 2677㎡, 건평 343.2㎡에 이르는 대규모 공사였다.
“이때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생산량을 늘린 만큼 찾는 사람들도 많아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죠.”
조금자 대표는 또다시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농식품과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다 한 홈쇼핑 업체와 연이 닿았다. 2015년 10월 ‘채소잡곡’을 소개하는 첫 방송이 전파를 탔다. 판매 결과는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매출이 많지 않은 오후 2시 40분 방송이었는데도 방송 40분 만에 준비된 물량 800세트가 모두 팔려나갔다. 이후에도 소개만 됐다 하면 완판 행진이 이어졌다. 2016년에만 홈쇼핑에서 24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2014년 맑은샘자연교육농원의 매출은 6000만 원, 40배의 성장이었다.
“홈쇼핑에서 너무 인기가 많다 보니 어안이 벙벙했죠. 무엇보다 아이들의 편식을 고쳤다는 부모님의 후기를 보면 특히 보람을 느꼈어요. 그때부터는 생산량을 늘리느라 정신이 없었고요.”
10명의 직원을 채용했고, 정읍을 넘어 김제, 완주 일대의 농가들과 거래를 확대했다. 하지만 ‘채소잡곡’의 인기가 많아지자, 비슷한 형태의 유사품들이 등장했다. 후발주자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가격을 낮추기 시작했다. ‘가격경쟁력’이 승부수인 홈쇼핑에서 ‘조금자 채소잡곡’은 점점 점유율이 떨어졌다.
나는 행복한 농부입니다
위기는 다시 기회가 됐다. 조금자 대표는 다시 새로운 제품을 생각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채소볼’이었다. 채소잡곡과 채소차가 잘게 다져진 채소의 형태를 유지한다면, 채소볼은 길게 채썬 채소를 뭉친 모양이었다. 특히 제7의 영양소라 불리는 피토케미컬은 ‘하루에 다섯 가지 이상의 색깔 있는 채소와 과일을 섭취할 때’ 생성된다. 채소볼이 있으면 영양도 잡으면서 웬만한 요리는 뚝딱 만들 수 있다.
▶ 물에 불리면 채소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채소볼’ ⓒ맑은샘자연교육농원
“채소의 성질을 연구해서 각각의 모양과 풍미를 살리면서 건조시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맛과 식감은 흉내 낼 수 없죠.”
조금자 대표는 신상품인 ‘채소볼’을 가지고 KBS ‘나는 농부다’에 출연했다. 5분 동안 자신의 제품을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조금자 대표는 자신을 ‘행복한 농부’라고 소개했다.
“채소의 부피와 중량을 줄이면서 유통기한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채소볼이에요. 감자와 호박, 당근, 양파, 적양파, 표고버섯 등 여섯 가지 채소를 둥글게 뭉쳐 1인분씩 만들었습니다. 건조 채소볼 15g에는 생채소 250g이 들어갑니다. 이 볼을 10분 동안 물에 불려서 사용하면 채소가 불어나면서 원래 모습으로 변합니다. 채소볼은 영양이 풍부할 뿐 아니라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여서 농가 소득도 안정화할 수 있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채소볼을 소개하는 조금자 대표의 발표는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현장에서 채소볼을 시식한 이들은 ‘실제 채소와 똑같은 맛이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과는 우승, 전국에 채소볼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맑은샘자연교육농원에 사용되는 재료의 85%가량이 정읍을 비롯한 전북 지역 농가들과의 계약재배를 통해 공급되고 있다. 제품에 쓰이는 재료를 모두 국산으로 쓰기 때문이다. 다른 농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이색 채소는 농원에서 일부 재배하고, 나머지는 계약재배로 사온다. 그가 한 해 동안 계약재배로 구입한 농산물은 1200톤에 이른다.
“면 단위 농업 지역의 한 해 채소류 생산량이 5000톤쯤 된다고 하니 상당한 양이죠. 농업마이스터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에 정착한 청년 농부와도 직거래를 하고 있는데, 물건이 참 좋아요. 회사가 더 잘되어 이런 젊은 농부들의 판로가 되어주고 싶어요.”
조금자 대표는 지난해 채소볼이 기대 이상으로 잘 나가면서 공급농가들에게 “더 많이 심어주세요”라고 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인근 농민들은 농번기에는 계약재배로 채소를 공급하고, 농한기에는 맑은샘자연교육농원에 합류해 함께 부업을 한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편식을 고치기 위해 ‘엄마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그를 ‘성공한 사업가’이자 ‘행복한 농부’로 만들어주었다. 보통 채소는 짧은 시간만 지나도 시들기 마련이다. 채소잡곡과 채소볼은 부피가 작은 데다 오랜 시간 저장과 보관이 가능해 미국와 일본, 홍콩 등의 바이어들도 관심을 보인다. 2017년 3월 미국 뉴욕 현지 마켓에 처음 선보였는데 재구매 요구가 늘면서 2차, 3차 수출로 이어졌다. 앞으로 일정은 더 바빠질 테지만 조금자 대표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우유나 물에 부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선식’을 개발 중이다.
“한때는 농사를 시작한 걸 후회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40대 중반에 귀농한 걸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세계가 제 무대입니다.”
조금자 대표의 성공 아이디어
1 차별화된 아이디어가 있어야 상품화에 성공한다. 건강에 유익한 채소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게 포인트였다.
2 육식에서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뀌는 트렌드를 반영했다. 해외에서도 건강식품인 채소에 관심이 높다.
3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특허기술을 보유했다. 농촌진흥청의 지원으로 타사에서 모방할 수 없는 채소 건조가공기술을 보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