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자리에 기분 좋은 그늘이, 쨍쨍했던 하늘엔 청명감이 찾아든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견딘 수고에 대한 보답일까. 가을이 불러온 풍광은 선물 같기만 하다. 예고 없이 가을이 왔듯 곧 겨울 추위가 스며들 터.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아름다운 정취를 눈에, 가슴에 담는다.
가고 또 가도 새로움이 기다리는 제주. 계절마다 자아내는 풍경이 수많은 발길을 사로잡는다지만 특히 가을은 이곳 자연이 가장 빛나는 때다. 바람에 넘실대는 금빛 억새, 돌담과 어우러진 주황빛 감귤을 보고 있자니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 가을 하늘 아래 억새가 넘실대는 제주 올레길 ⓒ조선DB
▶ 제주올레 해안길을 따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 ⓒ한국관광공사
가을 속 제주를 오롯이 새기고 싶다면 도보 여행길에 오르는 것만큼 좋은 선택이 있을까 싶다. 거니는 속도에 따라 기억되는 모습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제주올레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여행길이다. 올레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그 의미를 담아 붙인 제주올레는 골목길, 산길, 해안길, 오름 등을 연결해 섬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돼 있다.
총 코스는 26개, 그 길이는 제주 해안선 둘레인 253km를 훨씬 웃도는 425km다. 2007년 9월 제주 동쪽 끝 성산일출봉을 지나는 1코스가 문을 연 뒤 모든 코스가 완성되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어느 코스 하나 나무랄 데 없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19코스는 다채로움을 더한다. 이 코스는 제주시 조천 만세동산을 시작으로 신흥, 함덕, 북촌, 동복을 거쳐 김녕으로 이어지는 총 19.4km 구간이다. 바다와 오름, 마을, 밭 등 제주의 가장 수려한 순간이 지루할 새 없이 나타난다. 아무리 훌륭한 경치가 있는 공간일지라도 그 안에 너무 오래 머물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19코스는 조금 다르다. 밭에서 물빛 고운 바다로, 바다에서 솔향 가득한 숲으로, 숲에서 정겨운 마을로 이어지는 길의 전환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다. 알맞은 때 알맞은 풍경이 반겨온다.
구간 길이로만 보면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섣부른 걱정이다. 전 구간이 평탄한 덕에 서우봉 오르는 길에서만 숨을 잘 고른다면 누구나 쉬이 걸을 수 있다. 보통 걸음으로 약 6~7시간이 소요된다. 다만 일부 구간에선 통신 장애가 발생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또 곶자왈 지역은 혼자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제주 여행 지킴이’ 단말기를 이용할 것을 권유한다.
19코스는 풍광이 좋기로도 유명하지만 곳곳에 제주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의미를 더한 구간이다. 출발점인 조천 만세동산은 조천만세운동을, 코스 중반부에서 만나는 마을 북촌리는 제주 4·3 당시를 확인하게 한다.
이 밖에도 제주올레 코스 중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망설여진다면 제주올레 누리집(www.jejuolle.org)의 ‘맞춤올레’ 코너를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계절과 지형, 날씨, 도보 여행 경험 유무, 인원 등을 선택하면 전체 코스 중 개인 취향에 꼭 맞는 길을 추천해준다.
만약 걷다가 길 잃을 염려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 ‘간세’가 갈림길을 안내하는 덕분이다. 간세는 제주올레를 상징하는 조랑말 이름에서 따온 화살 모양 이정표로, 간세 머리가 향하는 쪽이 정방향이다.
오랜 걸음에 흐르는 땀은 막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싫지만은 않은 건 이 계절만이 줄 수 있는 바람 때문이다. 숨이 가쁠 즈음 속도를 조금 줄여보자. 가을바람의 선선함이 금세 땀을 식혀준다. 이 기분이야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제주올레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찾아 찍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종의 올레 여행증명서로 이해하면 된다. 여권 크기에 코스별 완주 확인 스탬프 페이지, 메모장, 교통정보, 할인업체 등이 수록됐다.
▶ 1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사방으로 비경이 보인다.
2 용머리해안에서 볼 수 있는 사암층 암벽 ⓒ한국관광공사
‘화산섬으로서 제주’를 마주하는 여행길도 있다. 일명 ‘제주 지질트레일’이다. 수십만 년 전 화산 활동은 오늘날 제주의 경이로운 지형을 빚어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0년에는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대표 지질명소로는 한라산, 수월봉, 산방산, 용머리해안, 성산일출봉, 비양도 등 12곳이 있다. 제주 지질트레일은 이들 명소를 중심으로 주변 마을의 역사, 문화, 생활 등의 이야기를 접목해 만든 도보 여행길이다.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부터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수월봉 지질트레일까지 총 4개로 구성됐다.
또 다른 제주, 지질트레일 여행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은 태고의 신비함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제주의 탄생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다. 이 길은 A, B 두 코스로 나뉘며 각각 13.2km, 10km에 달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을 만큼 해안과 섬, 산의 조화가 빼어난 형제해안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비롯해 산방산탄산온천, 올레크루즈, 사계어촌체험마을의 해녀 체험 등 각종 체험이 가능하다. 코스에 들어서기 전 용머리해안에 들러야 한다. 겹겹이 쌓인 지층이 그 자체로 장관이다. 한라산보다 먼저 형성됐다는 용머리해안은 땅속에서 올라온 마그마가 지하수를 만나 분출된 화산재의 결과물이다. 좁은 통로를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 사암층 암벽이 나오는데, 이 모습이 바다로 뛰어드는 용머리처럼 보인다 해서 용머리해안이다. 단, 밀물 때나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 입장이 불가할 수 있다.
만장굴 지역에 속한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용암동굴 위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지역 주민의 생활상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의 뭍을 가로지르며 걷는 길과 바닷가를 따라 걷는 길로 이뤄져 있고 각 길의 특징에 맞춰 ‘드르빌레길’(9km), ‘바당빌레길’(5km)이라 이름 붙였다. ‘드르’는 ‘들’을, ‘바당’은 ‘바다’를, ‘빌레’는 ‘넓적하게 펴진 암반’을 일컫는 제주 토박이 말이다. 이름 그대로 김녕과 월정, 두 마을은 온통 빌레 지대라 걷다 보면 드르빌레와 바당빌레를 고루 만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덧붙여 이국적 분위기의 카페가 즐비한 월정 카페거리가 코스 중간에 자리해 피로감을 덜어준다.
성산일출봉 지역의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은 7.1km의 코스로 걸으면 3시간, 성산일출봉까지 포함하면 30~40분가량 더 걸린다. 빠른 걸음으로 시간을 줄일 수도 있겠지만 이 길 위에선 자연히 속도가 느려진다. 눈에 담고 싶은 아름다운 광경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기 때문. 일제 동굴진지 유적지, 시인 이생진 시비 거리 등 볼거리도 많다. 특히 ‘성산 10경’ 중 하나인 식산봉은 빼놓을 수 없다. 일출봉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식산봉 옆에 드리운 내수면에 비치면 두 개의 달, ‘쌍월’을 볼 수 있다.
수월봉은 높이 77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오름이지만 다양한 화산 퇴적 구조가 지층 속에 남아 있어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라 불린다. 지질 자원을 살피는 게 이곳의 묘미다. 수월봉 정상까지는 차량으로 쉽게 오를 수 있고 꼭대기 전망대에선 차귀도, 송악산, 단산, 죽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수월봉 지질트레일을 더 심도 있게 여행하려면 전해지는 이야기를 알고 가는 것이 좋다. 수월봉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찾아 절벽을 오르던 누이 수월이가 떨어져 죽고, 동생 노고마저 눈물을 흘리다 죽었다. 이후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했고 남매의 효심을 기려 그 언덕을 ‘녹고물오름’이라고 불렀다.
가을 정취 품은 명소
역사가 깃든 가을 청주 청남대
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느끼고 싶다면 청남대를 권한다. 곱게 물든 단풍과 대청호 물빛이 가을의 깊이를 전해온다. 대청호가 주변을 휘감아 돌고 옥새봉, 월출봉, 작두산, 소위봉이 빙 둘러싸 풍수학자들은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 수려한 경관은 당연하고 오랜 시간 보호받은 덕에 생태계가 매우 청정하다.
청남대는 매년 평균 80만 명이 찾을 만큼 국민관광지로 익히 알려졌는데, 본래 역대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면서 국정을 구상하던 별장이었다. 1983년 12월 완공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여름휴가와 명절연휴 등 매년 4~5회가량 이용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월 4월 18일 대중에 전면 개방됐다.
대통령들의 이름을 붙인 청남대 산책로 중 한두 곳을 골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만약 승용차로 청남대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누리집이나 모바일로 미리 예약해야 하는 점 기억해두자. 미예약자와 대중교통 이용자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한 뒤 버스에 탑승하면 된다.
한 폭의 산수화 단양팔경
산과 강, 계곡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충북 단양. 그 안에서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덟 곳을 일컬어 단양팔경이라고 한다. 남한강 상류에 섬처럼 솟은 제1경 도담삼봉을 비롯해 거대 돌기둥 제2경 석문, 거북을 닮은 제3경 구담봉, 대나무 싹과 흡사한 제4경 옥순봉, 운선구곡에 자리한 제5경 사인암, 선암계곡에 누운 제6경 하선암, 제7경 중선암, 제8경 상선암을 이른다.
단양팔경 중에도 으뜸이 있으니, 단양 여행의 시작이자 마침표라 칭하는 도담삼봉이다. 물 위로 우뚝 선 세 개의 봉우리 중앙에 정자가 자리해 극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여기서 상류로 200m가량 올라가면 왼쪽 강변으로 무지개 모양의 석주가 보이는데 바로 석문이다. 석회동굴이 무너진 후 천장 일부가 남아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가운데 뻥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남한강과 마을 풍경은 마치 액자 속 그림 같다.
늦가을의 낭만 영남알프스
영남알프스는 해발 1000m 이상의 9개 산이 뽐내는 풍광이 유럽 알프스와 견줄 만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이맘때 황금억새평원에 나부끼는 순백의 억새가 가히 환상적이다. 10월 중순부터 늦가을까지 은빛 억새의 바다가 장관을 이룬다. 국내 최고 가을 산행지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새 산행 1번지인 영남알프스에서도 간월재(신불산과 간월산 능선이 만나는 곳)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등산 초보자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어서다. 등산길은 여럿이지만 가장 편한 코스는 등억온천단지 안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에서 시작하는 길이다. 나무 계단과 흙길, 임도를 따라 2시간 남짓 오르면 간월재 억새 평원에 닿는다. 해발 900m 고개가 온통 억새로 뒤덮이고 그 사이로 나무 데크 탐방로가 놓여 산책엔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