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 공간의 내용도 바뀐다. 1953년, 6·25한국전쟁 이후 50년간 미군이 주둔해온 공간인 캠프 그리브스가 평화의 정거장이 됐다. 국내 가장 오래된 미군기지 중 한 곳인 캠프 그리브스는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 떨어져 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 그리브스를 추모해 ‘캠프 그리브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2004년 마지막 주둔 부대였던 미2사단 506보병대대가 철수한 뒤 한미정부는 이곳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철거 위기에 처했던 캠프 그리브스는 2013년 민간인을 위한 평화안보 체험시설로 탈바꿈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군 시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비무장지대와 인접한 만큼 천연 생태를 유지하고 있다. 또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유시진 대위(송중기)가 근무했던 우르크 본진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 1 김명범, ‘부유하는 나무’, 2018 ⓒC영상미디어
▶ 2 강현아, ‘기이한 DMZ생태누리 공원’, 2018
3 탄약고 프로젝트 #1.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4 김명범, ‘플레이 그라운드 제로’, 2018
5 김명범, ‘미끄럼틀, 그네’, 2018 ⓒC영상미디어
DMZ 캠프 그리브스에서는 8월 11일부터 ‘평화 정거장 사업’으로 예술창작 전시를 진행 중이다. 탄약이 쌓여 있던 공간, 미군이 생활하던 막사에 예술 작품이 자리 잡았다. 각 작품은 DMZ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에 변화의 바람을 담았다. 김명범, 박찬경, 정문경, 정보경 작가가 초청됐고, 공모에서 선정된 강현아, 박성준, 시리얼타임즈, 인세인박, 장영원, 장용선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공간을 재해석했다.
먼저 야외 전시 입구에는 인세인박 작가의 ‘ISM ISM 잊음 잊음’이라는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이념으로 말미암은 대립과 분쟁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가 담겼다. 철창으로 둘러싸인 풀길을 걷다 보면 강현아 작가의 ‘기이한 DMZ 생태누리 공원’과 마주친다. 그는 DMZ에 서식했던 식물과 동물도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 것이라 짐작한다. 전사자의 유해가 묻힌 땅 위에는 ‘넋두리 할미꽃’이 자라고, 불안한 경계태세에 길들여진 부엉이는 ‘신경쇠부엉이’가 된다. 전쟁 후유증을 앓는 ‘외상 후 나무’나 지뢰 인근에 자라는 ‘지뢰 탐지 고비식물’도 이 공원의 식구들이다.
65년 만에 문 연 캠프 그리브스
미군이 사용하던 퀀셋(quonset) 막사를 리뉴얼한 전시관에는 비품실, 화장실, 샤워실, 보일러실, 중대사무실, 저장고와 보급소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다큐멘터리관에서는 한국전쟁과 미군의 한반도 주둔, 캠프 그리브스의 역사, 정전협정 이후 남북정상회담 기록 등이 전시되고 있다. 이어 기획전시관에서는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의미와 역사, 가치를 담은 다큐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DMZ 다큐시네마전’과 정전협정 이후 판문점에 주재하며 남과 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정전 65년 기념 NNSC 사진전’이 진행 중이다.
눈에 띄는 건 오픈 스튜디오다. 미군이 사용하던 탄약고와 정비고가 전시 공간이 됐다. 도르래를 돌려 문을 열면 그 안에 있는 건 미끄럼틀과 그네다. 탄약이 담겨 있던 비정한 공간이 아이들이 뛰어노는 다정한 공간이 됐다. 김명범 작가는 이 작품에 ‘플레이 그라운드 제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작가는 이 공간이 냉전의 역사를 담았지만 앞으로는 평화와 놀이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비고에서는 ‘부유하는 나무’가 전시 중이다. 뿌리째 뽑힌 나무는 죽은 것 같아 보이지만, 붉은 생명의 열매를 담아 하늘로 비상하고 있다. 죽은 것 같은 존재도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이는 그대로 폐쇄될 뻔했던 ‘캠프 그리브스’의 재탄생과도 연결된다.
▶ 1 장용선, ‘Treasure’, 2018 ⓒC영상미디어
▶ 2 미군 막사를 그대로 보존한 전시장
3 찬경, ‘소년병’, 2017 ⓒC영상미디어
미디어 프로젝트로 진행 중인 박찬경 작가의 ‘소년병’은 한 편의 동화다. 아날로그 카메라를 이용해 한 소년의 하루를 담았다. 이 작품은 작가의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란 온 작가의 어머니는, 당시 자신의 집 마당에서 북한군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가 놀란 이유는 그가 북한군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어린 소년이어서였다. 실제로 영상 속에서 소년은 군복을 입었을 뿐, 숲 속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노래를 부르며 한때를 보낸다. 이 소년의 가녀린 팔에 총이 쥐어지고, 결국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다시 묻게 만든다.
DMZ 평화의 정원에 전시된 정문경 작가의 ‘Full Square’에는 헌옷으로 만든 막사가 지어져 있다. 차갑고 날카로운 전쟁의 공간을 따뜻하고 발랄한 옷감으로 채웠다. 정보경 작가는 ‘미사일 금지구역’이라는 작품으로 오랜 휴전으로 지속된 분단국가의 전시 상황을 표현했다. ‘구부러진 직선’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더 이상 DMZ가 전쟁의 공간이 아닌 평화의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장용선 작가는 캠프 그리브스에서 이전부터 살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재료에 주목했다. DMZ에 자라는 잡초와 한편에 뒹굴고 있던 철창 그리고 소리 없이 자라나는 강아지풀을 모아 캠프 그리브스의 좌표값을 표현했다.
예술창작 전시 기간은 8월 11일부터 2019년 7월 31일까지, DMZ 평화의 정원 전시 기간은 2018년 10월 31일까지다. 전시 기간 동안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거리예술공연 놀아보자 in DMZ’도 진행될 예정이다.
“전쟁의 허망함을 말하고 싶었어요”
정보경 작가
DMZ 평화 정거장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2012년부터 미사일 프로젝트라는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전시 제목은 ‘공갈탄’이었는데, 장난으로 던진 탄알로도 누군가는 공포를 맛보잖아요. 한반도의 상황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불안에 시달려야 하니까요. 미사일 같은 공포의 무기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DMZ가 가진 공간의 특성이 있다면요?
제 작품 ‘구부러진 직선’이 잘 보여줍니다. 이 작은 돌들이 예술지대에서 시작해서 군사지대까지 이어지거든요. DMZ는 이제 군사적인 긴장과 예술의 역동성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무기가 가진 성질은 강하고 단단하지만 제 작품 ‘탕탕탕탕탕, OOOO’에서는 약하고 속이 비치고 깨지는 유리로 바뀝니다. 이를 통해서 전쟁의 공허함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