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팀에 져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독일은 브라질과 함께 여전히 최강의 축구팀이다. 그래서 노란색 셔츠와 파란색 팬츠의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만큼이나 흰색 셔츠와 검정색 팬츠의 독일 대표팀 유니폼은 강팀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렇듯 동일한 디자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되면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아이덴티티가 된다. 나에게는 독일 하면 떠오르는, 축구 대표팀 유니폼보다 훨씬 오래된 독일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고딕체’다.
요즘 그런 대단히 독일적인 서체가 자꾸 눈에 밟힌다. 바로 맥주의 레이블 디자인이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 때문에 맥주 소비가 10% 이상 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면 편의점에 들러 맥주 코너를 살핀다. 요즘 편의점에서는 4개에 1만 원, 마트에서는 4개에 무려 9000원까지 할인해주는 수입 맥주가 아주 매력적이다. 왠지 수입 맥주는 패키지 디자인부터가 더 맛있을 거 같은 느낌이다. 맥주를 사려고 살피는데 못 보던 패키지가 눈에 들어왔다. 발음하기도 힘들게 생겼지만, 나는 그게 독일 맥주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글꼴 디자인 때문이다.
‘아포스텔 브로이(Apostel Bräu)’라는 이름의 이 맥주는 결코 세련됐다고 할 수 없다. 약간 삐뚤삐뚤하고 투박하기까지 한 레이블 디자인을 표방하고 있다. 세리프(글자 세로획의 시작이나 끝에 돌출된 부분)가 좀 신경질적으로 꺾여 있는 것이 나치 친위대의 상징인 SS 마크와 닮아 있다. 물론 SS를 연상시키려고 이런 디자인을 한 것은 아니다. 고딕체를 바탕으로 디자인하니 자연스럽게 닮은 것뿐이다. 이런 종류의 디자인은 다른 나라가 흉내 내는 고딕체가 아니라 독일인만이 디자인할 수 있는 진짜 독일식 고딕체이다. 자연스럽게 아포스텔 브로이로 손이 갔다. ‘그래 오늘은 이 맥주를 마셔보자.’
‘고딕체’라고 하면 한국 사람들은 명조체와 대조되는 한글의 한 서체를 떠올린다. 명조체는 삐침(글자의 시작이나 끝에서 비스듬한 각도로 쓴 부분, 영문 알파벳의 세리프와 비슷하다)이 있는 글씨체이고 고딕체는 없는 것으로 구분한다. 언제부터인가 명조체는 바탕체로, 고딕체는 돋음체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고딕체(gothic)는 고트족(Goth)의 서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고트족’이라는 말은 중세 말기까지도 문명이 훨씬 앞선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이 이탈리아 반도 북쪽의 야만족을 경멸하며 부르는 말이었다. 우리에게 여진족이니 만주족이니 하는 말이 오랑캐를 가리키는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고트족도 마찬가지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그런 야만족이라 여겼던 고트족의 후예이자 오늘날 독일인의 조상이 15세기에 먼저 인쇄술을 발명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을 발명하고 책을 만들면서 그 책이 기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길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연히 당시 필경사들이 흔히 썼던 서체를 흉내 내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독일의 인쇄술과 금속활자가 유럽으로 퍼지면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크게 번성했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은 독일인이 만든 서체, 즉 고딕체는 말하자면 그들이 경멸하는 오랑캐의 서체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인은 재빨리 독일식 금속활자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것은 과거 영광스러운 로마시대의 글자를 흉내 낸 로만체(roman type)다. 오늘날 전 세계 책의 본문체로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로만체다. 로만체는 고딕체보다 가독성이 훨씬 뛰어나고 효율적인 서체다.
고딕체의 특징은 세로획이 굉장히 굵고 세리프도 굵고 날카롭다. 얼핏 보면 검정색이 지배적이어서 ‘블랙레터(black letter)’라고도 부른다. 가독성도 많이 떨어져서 현대인들은 잘 읽지 못한다. 그렇다면 고딕체보다 훨씬 가독성이 높은 로만체가 탄생했을 때 독일의 인쇄소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다. 프랑스와 영국이 재빨리 이탈리아식 로만체를 받아들이고 자체적으로 아름다운 로만체를 발전시켰을 때 독일은 여전히 고딕체를 고집했다. 심지어는 20세기에 이르러서도, 특히 나치처럼 매우 극우적인 정당이 집권했을 때 고딕체는 더욱더 민족의 서체로 숭상받았다. 나치 독일시대의 포스터나 책은 대부분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고딕체에 익숙한 독일인들은 로만체를 보여줬을 때 가독성이 떨어져서 읽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독성이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어서 익숙한 글자를 더 잘 알아보긴 한다.
물론 지금은 독일도 로만체를 보편적인 서체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딕체가 갖고 있는 특별한 이미지, 즉 독일적이라는 그 상징성은 여전하다. 그 상징성을 최근 무더위로 찾게 된 맥주 패키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아포스텔 브로이만이 아니다. 또 다른 독일산 수입 맥주인 바르슈타이너(Warsteiner) 로고도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아포스텔 브로이만과 달리 획의 굵기를 줄이고 좀 더 가다듬었지만, 세리프가 날카로운 고딕체가 분명하다. 특히 소문자 i의 점이 마름모 꼴인 건 고딕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슈테판스 브로이(Stephans Bräu)’라는 맥주 역시 고딕체 로고를 가진 독일 맥주다. 이 맥주의 고딕체는 즐거움을 주려는 듯 활기찬 곡선으로 디자인되었다. 하이네켄, 기네스, 아사히, 칭타오 같은 맥주에 식상해 있다가 이런 새로운 패키지, 그것도 독일적 특성이 강한 패키지를 만나면 호기심에서라도 한번 마시고 싶어진다. 독일 하면 또 맥주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독일 맥주가 아니지만 마치 독일적인 것처럼 흉내를 내는 맥주 로고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산 미겔이다. 산 미겔은 필리핀 맥주지만,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하이트 로고는 고딕체다. 하이트의 디자이너는 전형적인 고딕체가 가진 딱딱함을 완화시키려고 세리프 부분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었다. 소문자 i의 점도 둥글게 처리했다. 하지만 하이트의 로고 서체 역시 분명한 고딕체의 변형이다. 반면에 클라우드는 좀 더 딱딱한 고딕체를 유지하고 있다. OB 프리미어도 좀 더 순화한 부드러운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런 상징성을 알고 맥주를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어떤 디자인의 근거를 찾게 마련이다. 그런 배경에서 맥주로 유명한 독일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싶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