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소작인들이 모여 사는 만주의 어떤 마을에 ‘동포’ 청년 한 사람이 흘러들어온다. 생김새가 표독스러운 데다가 투전과 싸움질과 칼부림과 색시에게 덤벼들기 잘하는 것이 장기여서, 사람들은 그를 ‘삵’이라 불렀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를 쫓아내고자 했으나, 아무도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중국인 지주에게 그해 소작료를 바치러 갔던 송 첨지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와서는 끝내 절명한다. 소작료가 적다는 이유로 모질게 구타당했기 때문이다. 마을 젊은이들은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누구 하나 앞장서 항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삵은 혼자서 중국인 지주를 찾아갔다가 허리가 기역자로 꺾인 처참한 모습으로 동구 밖에서 발견된다. 삵은 자기 주위에 둘러선 마을 사람들에게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고 말한 뒤 숨을 거둔다. 마을 사람들은 삵의 죽음을 조상하며 애국가를 부른다. 지금도 실려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전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의 줄거리다. 내가 학생일 때는 이 소설에 담긴 주된 정서가 ‘민족주의’라고 배웠다.
1931년 7월, 만주 만보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농업용 수로 개설 문제로 다툼이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이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조선인 농민이 중국인 관헌에게 피살당했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 땅의 조선인들은 평소에 감춰왔던 ‘동포애’를 한껏 발휘해 이웃에 살던 중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그들의 집과 가게를 불태웠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재일(在日) 조선인들에게 했던 짓이, 그 8년 뒤 조선 땅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중국인들을 상대로 재연됐다. 일본인들 앞에서는 옴짝달싹못하는 조선인들이었으나, 중국인들에게는 내면의 폭력성과 광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발산했다. 그런데 사실 만보산에서 피살된 조선인은 없었다. <조선일보> 장춘 특파원 김달삼이 일본군의 사주를 받아 허위 사실을 송고했다는 사실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려졌다. 그러나 일단 조선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조선 전역에서 반(反)중국인 폭동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1931년 9월, 일본군은 만주를 침공해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군이 허위 사실을 유포해 식민지 조선인의 반중국 정서를 고취한 것은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이 중국 땅에서 중국인들에게 박해받는 조선인을 구원하는 일이며, 나아가 조선인이 넓은 대륙에서 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조선인이 중국인을 멸시하고 증오하면 할수록, 일본인에 대한 반감(反感)과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든다는 점을 잘 알았다. 많은 조선인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이 같은 정치적·전략적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화뇌동했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지식인들은 심지어 한국인의 민족주의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중국인을 집어넣으려 들었다.
김동인이 잡지 <삼천리>에 단편소설 <붉은 산>을 발표한 것은 만주사변 1년 반 뒤인 1933년 4월의 일이었다. 오늘날의 중등학교 교과서에는 민족주의를 고취한 소설로 소개돼 있으나,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인이 민족주의 정서를 표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그 무렵은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김동인 본인이나 소설을 게재한 잡지사는 이 소설로 말미암아 아무런 탄압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 소설의 주조(主調)가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 이간주의였기 때문이다.
요즘도 한중 정상회담 때는 양국 정상이 종종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운 과거’에 대해 언급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중국인은 ‘심정적 동맹’ 관계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물론 많은 항일 민족운동 단체들과 독립군 부대들이 중국에서 활동했다. 한국 독립운동에는 중국인의 지원과 양해가 필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 사이에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과 혐오감이 높아지자, 중국인이 조선인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많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보았다. 한중 양 민족을 이간해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약화시키고 한반도의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뒀다.
발표된 지 80년도 더 지난 소설 <붉은 산>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런 현상이 수시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최저임금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도 문제의 근원을 천착하기보다는 현상에만 집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리뼈나 근육에 문제가 생겨 다리가 아플 수도 있지만, 문제는 척추에 있는데 통증은 다리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은 최저임금이 올라 자영업자들이 다 망하게 생겼다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 임금도 못 줄 정도면 사업을 그만두라고 반발한다. 그런데 이해 당사자들의 실제 생활을 들여다보면, 영세자영업자나 최저임금 소득자가 결코 남일 수 없다. 남편은 영세자영업자이고 부인은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이거나, 영세자영업자 부부와 최저임금 노동자 자녀가 함께 사는 가정이 적지 않다. 영세자영업자나 최저임금 노동자나 모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경제의 틀과 체질이다. 재벌 기업은 중소기업에 어려움을 떠넘기고, 중소기업은 영세자영업자들에게 어려움을 떠넘긴다. 상가 건물 임대료,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불공정 계약에 따른 부담, 신용카드 수수료 등 영세자영업자들을 괴롭히는 요인은 최저임금 외에도 많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영세자영업 비중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그런데도 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분노가 유독 큰 것일까? 늘 얼굴 맞대고 부리던 아르바이트생들이 만만하기 때문은 아닐까? 최저임금 인상 문제를 영세자영업자 대 최저임금 노동자 간의 대립으로 몰아가기보다는,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꿀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 목소리는 이토록 높은데, 임대료 인상률 상한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는 왜 잘 들리지 않는 것일까? 문제는 언제나 ‘최저’가 아니라 ‘최고’에 있다. 고개를 돌리면 피안(彼岸)이다. 관점만 바꿔도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고통을 떠넘기려 들면 서로가 고통스러울 뿐이다.
전우용│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