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무관심’을 이야기할 때면 2030세대가 함께 언급되곤 한다. 정치 참여도가 낮은 세대로 대표돼서다. 하지만 2030세대는 항변한다. 절실함을 대변할 수 있는 창구가 너무 좁다고, ‘대변자’라고 일컬어지는 일부 주체는 맡은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정치 스타트업 ‘투정’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생한 세대)가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이 되려 한다. 무엇보다 그 과정이 쉽고 즐거울 수 있도록 말이다.
▶ (왼쪽부터) 안경진 콘텐츠 크리에이터, 박진영 서비스 개발자, 임동진 기술 책임자, 김예인 대표 모두 20대 청년이다. ⓒC영상미디어
‘투정’은 다섯 명의 구성원을 둔 소규모 스타트업이자 소셜벤처다. 국회 입법안을 발굴하고 그것을 공론화하는 게 이 회사의 활동이다. 2017년 여름 프로그래밍 동아리에서 만난 초기 멤버 세 명이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해오다 지난 4월부터 법인으로서 성격을 갖추게 됐다. 여느 조직이 그러하듯 투정은 회사 이름에 활동 방향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정치에게 말한다’는 의미의 to정, 두 번째는 ‘투정부리는 것처럼 정치 이야기를 쉽게 꺼내보자’라는 뜻이다.
“국회 입법이라고 하면 무겁고 어렵다는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우리 현실 속 이야기인데 말이죠. 막상 또래 친구들에게 판례나 입법 과정을 평범한 대화처럼 설명해주면 굉장히 재밌게 듣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깨달았어요. ‘아, 정치를 바탕으로 매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겠구나.’ 평소 관심사가 같던 동아리 동료끼리 뭉치는 계기가 됐어요.”
인터넷 쇼핑하듯 둘러보는 입법안
김예인 대표부터 박진영 서비스 개발자, 안경진 콘텐츠 크리에이터, 임동진 기술 책임자, 박선후 디자이너까지 구성원 모두 20대 청년이다. 여러 세대 중에서도 밀레니얼 세대를 서비스 제공 주요 타깃으로 설정한 이유다. 가장 깊숙이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세대의 지원책이 되고 싶다는 판단에서다.
초기 구성원을 프로그래밍 동아리에서 꾸린 건 투정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주효했다. 이 동아리는 웹 개발 기술을 배우고 플랫폼, 서비스 등을 만드는 곳이다. 덕분에 투정은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용자들은 평범한 쇼핑을 하는 것처럼 국회 입법안을 살펴볼 수 있다. 나아가 투정은 특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입법안, 특히 국회에 계류 중인 입법안을 찾아내 그 내용을 디자인 상품에 표현한다. 상품 수익금은 해당 법안 심사가 지연되고 있음을 알리는 지하철역사 광고비용으로 쓰인다.
▶ 투정은 ‘데이트폭력 피해자 보호법’의 내용을 상징하는 일러스트를 휴대폰 케이스에 새겼다.(왼쪽) 지난 7월 한 달 동안 서울 지하철 강남역에 게재된 스크린 광고(오른쪽) ⓒ투정
그렇게 진행된 첫 프로젝트가 ‘데이트폭력 피해자 보호법 공론화’다. 데이트폭력 피해자 보호법은 데이트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조명될 때마다 발의됐지만 심의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오랜 기간 계류 상태다. 투정은 이 법안을 상징하는 일러스트를 휴대폰 케이스와 타투 스티커에 새겼다. 이들 상품으로 모인 수익금은 1000만 원. 지난 7월 한 달 동안 서울 지하철 강남역 안 한편에 스크린 광고를 게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광고로 법안 심사가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분들이 많아요. 그동안 데이트폭력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조차도 입법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긴 힘들거든요. 큰 성과를 꼽자면 광고 내용이 그대로 여성가족부 장관께 보고돼 올 하반기 국회에서 공청회와 추가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거예요. 꼭 저희가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는 이슈라지만 입법 가속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투정은 유독 입법 과정에 집중한다. 대다수 사회문제는 법이 개정돼야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김예인 대표는 “국회 입법 절차 내용은 법안이 최종적으로 통과되기 전까진 잘 다뤄지지 않는다”면서 “입법안은 사회문제 솔루션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굉장히 높은 콘텐츠”라고 말했다.
프로젝트 주제(입법안)를 선정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우선 우리 일상,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 이와 함께 정량적 요소를 평가하는데 ‘입법안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류됐는지’, ‘계류 기간 동안 회의는 몇 번이나 진행됐는지’, ‘국회 자료에 치명적인 결함은 없는지’ 등을 확인한다. 첫 주제 선정 때만 해도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모든 안건을 직접 살폈다. 한 번은 읽어봐야 투정만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제보도 받고 있다. 제보자의 문제 중 해결 가능한 입법안은 서둘러 통과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현재 물망에 오른 주제는 가정폭력, 유기견 보호 등이다. 김 대표는 이르면 9월 초에 두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자생력 갖춘 정치 스타트업 돼야
투정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공식 플랫폼 재단장은 그중 하나다. 기존 모금 절차는 다른 사이트에서 이뤄졌는데, 이젠 투정 플랫폼에서도 할 예정이다. 또 이용자들은 ‘법안 구매하기’를 선택하면 해당 상임위원회 의원들에게 청원 전자우편을 전송할 수 있고 ‘내 인생으로 배송하기’를 누르면 입법 현황 구독 서비스와 디자인 상품을 수령할 수 있다. 일종의 ‘법안 쇼핑몰’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투정은 계류 기간, 심사 주체 등의 조건을 붙여 각 입법안을 검색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도 보유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직원 외에 일반 이용자들도 사용하는 방법을 고려 중이다.
▶ 국회의원이 직접 입법안을 설명하는 콘텐츠를 제작해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투정
김 대표는 투정이 스타트업인 만큼 실시간 사회 트렌드에 발맞추고자 다방면의 인력을 채용했다. 얼마 전 합류했다는 안경진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대표적이다. 색다른 콘텐츠의 영향력이 날로 커져가는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안경진 크리에이터는 국회의원이 법안을 설명하는 콘텐츠, 입법 과정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유쾌하게 풀어낸 콘텐츠 등을 제작했다.
“콘텐츠 만들기에 앞서 많은 고민을 해요. 그 콘텐츠를 접했을 때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가장 조심하죠. 누구든지 쉽고 마음 편하게 수용할 수 있는 콘텐츠여야 합니다. 다른 콘텐츠에 달린 댓글을 많이 챙겨보는 것도 그래서예요.”
정치를 근간으로 한 스타트업은 비단 투정만이 아니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최근 들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다만 재정 측면에서 자생력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전 정치 스타트업들이 수익 면에서 고전하다 폐업에 이르거나 시민단체로 돌아서는 사례가 있었어요. 안타깝지만 현실이죠. 저희도 아직 자생 가능할 정도의 수익을 내진 못해요. 지금은 정부 지원사업과 엔젤투자로 사업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수익률 향상 방안을 더 찾아야겠죠. 자생 가능한 정치 스타트업이 되는 것도 투정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첫 프로젝트 후 일정 수익을 거둔 건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생각해요.”
김 대표에 따르면 해외에서는 정치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꽤 활성화된 편이다. 단순히 입법안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한 수준의 시스템임에도 많은 투자가 이뤄진다. 탄탄한 투자에 힘입어 법안이 통과됐을 때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하는 기업도 생겼다고 한다. 김 대표는 이러한 구조가 국내에도 정착됐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정치 참여 유도하는 통로 역할
한편으론 정치 스타트업이 꾸준히 출현하는 게 그리 달가운 현실은 아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국민이 기존 정치 과정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것.
“우리가 국회에 의견을 말하는 방법, 청원이라고도 하죠. 그걸 하려면 국회의원 한 명의 추천을 받아야 해요. 국회의원을 지인으로 둔 국민이 그렇게 많을까요. 더군다나 국회의원 구성을 보면 청년이나 소수자,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서 그들의 의견이 대변되는 환경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봐요. 결국 정치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다 보니 정치 스타트업과 같은 시도가 계속되는 거죠.”
박진영 개발자는 쌍방향 소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도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많은 사람이 청와대 국민청원 과정에서 정부가 내 목소리에 응답한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는다”며 “소통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정치 스타트업도 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치 스타트업을 두고 편중된 성향을 우려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투정 측은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프로젝트 주제로만 보면 흔히 말하는 정치색을 드러낼 순 있겠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희는 저마다 지지하는 정당도 성향도 다르지만 그런 부분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요. 입법은 정치 성향과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러 정당의 관계자들을 저희 영상 콘텐츠에 등장시키는 이유기도 하고요.”
투정은 ‘정치’가 결코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정치는 생활의 일부일 뿐 특정 층만이 주도할 수도, 주도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라고. 그렇기에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투정’이었으면 한다.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법이 필요할 때 생각나는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싶어요. 2030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하지만 저마다 자신과 관련한 문제엔 관심이 많아요. 높은 장벽 탓에 어떻게 정치에 참여하고, 해결 방법을 찾을지 알지 못했을 뿐이에요. 무조건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젊은 세대가 정치를 ‘내 문제’로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먼저니까요.”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