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독일을 2 대 0으로 제압했다. 대표팀은 지난 6월 28일(한국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F조 3차전에서 FIFA 랭킹 1위이자 디펜딩 챔피언 독일에 승리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우리 대표팀의 FIFA 랭킹은 57위다.
▶ 독일전 경기가 끝난 후 승리를 만끽하는 축구대표팀 ⓒ연합
신태용 감독은 독일전에 4-4-2 포메이션을 내세웠다. 최전방에는 손흥민과 구자철이 나섰고 중원에는 문선민, 정우영, 장현수, 이재성이 나섰다. 기성용은 멕시코전에서 종아리 부상을 당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기성용 대신 정우영이 처음으로 선발로 출전했고 그간 중앙 수비수로 활약했던 장현수가 정우영과 함께 미드필더로 뛰었다. 포백 수비진은 홍철, 김영권, 윤영선, 이용이 맡았고 앞서 치른 두 경기와 마찬가지로 조현우가 골키퍼로 나섰다.
앞서 스웨덴,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우리나라는 결사 항전하는 자세로 경기에 임했다. 한국은 점유율에서 독일에게 밀렸지만 골문 앞을 사수하며 결정적인 슈팅을 모두 막아냈다. 정우영과 이재성은 경고를 받을 정도로 거칠게 상대팀을 몰아붙였다.
결정적인 슈팅은 대표팀이 더 우세했다. 독일의 슈팅은 우리 수비수에게 막히거나 골문을 한참 벗어났다. 전반전이 중반에 흘렀을 무렵에 대표팀에 기회가 찾아왔다. 정우영이 아크 정면에서 얻어낸 프리킥을 무회전 슈팅으로 연결했다. 정우영의 슛을 독일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문전에 있던 손흥민이 발을 뻗었지만 노이어가 간발의 차로 먼저 쳐냈다. 손흥민은 뒤이어 찾아온 찬스에서 상대 수비수를 맞고 나온 공을 페널티박스 오른쪽에서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했지만 공이 위로 떴다.
▶ 독일의 위협적인 슛을 막아낸 골키퍼 조현우 ⓒ연합
전반전을 0 대 0으로 마친 한국은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실점할 위기에 처했다. 후반전이 시작된 지 2분 만에 독일의 레온 고레츠카가 측면에서 넘어온 크로스를 날카로운 헤더로 연결했지만 골키퍼 조현우가 몸을 날려 막아냈다. 곧이어 티모 베르너가 페널티박스 정면에서 슛을 날렸지만 골문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투지
독일이 우리 진영에서 위협을 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대표팀에게도 역습의 기회가 찾아왔다. 대표팀은 독일 수비 뒤 공간을 노렸다. 하지만 경기 내내 수비에 체력을 쏟아 역습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서로 간 난타전이 이어졌지만 양쪽 모두 골을 넣지 못했다.
▶ 독일전 후반 추가시간 3분 무렵 김영권이 독일의 골문을 가르는 첫 골을 넣고 있다. ⓒ연합
▶ 독일전 경기 후반 한국 김영권의 슛이 비디오 판독(VAR) 결과 골로 인정되자 신태용 감독과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
▶ 이재성과 김영권이 독일의 사미 케디라와 공을 서로 갖기 위해 몸싸움을 하고 있다. ⓒ연합
우리나라와 독일의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F조의 다른 경기에서는 스웨덴이 멕시코를 3 대 0으로 격파하며 우리나라의 16강행은 실패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태극전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경기 내내 독일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대표팀은 후반전 추가시간에 두 골을 몰아넣었다. 수비수 김영권이 상대 수비진이 실수한 기회를 노려 골망을 흔들었다. 경기 종료 직전 독일 골키퍼 노이어가 골문을 비우고 나오자 손흥민이 텅 빈 골대에 추가골을 넣었다.
▶ 독일전 경기 종료 후 서로 격려하는 축구대표팀 ⓒ연합
대표팀이 독일전에서 보여준 활약은 놀라웠지만 앞선 경기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지난 6월 18일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조별리그에서 0 대 1로 패했다. 대표팀은 후반 20분 스웨덴 주장 안드레아스 크랑크비스트에게 페널티킥 실점을 허용하며 아쉽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6월 24일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는 멕시코에 1 대 2로 패했다. 대표팀은 전반 24분 장현수의 핸들링 파울로 페널티킥을 허용했고 전반 26분 카를로스 벨라가 페널티킥을 성공했다.
한국은 후반전 내내 동점골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후반 7분 문선민이 날린 슈팅이 멕시코 수비수에게 막혔고 후반 11분 기성용이 페널티에어리어 왼쪽 코너에서 날린 슛은 골키퍼가 잡아냈다. 후반 21분 결국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의 슈팅이 대표팀의 골문을 가로질렀다. 점수 차가 2점으로 벌어지면서 한국은 절실하게 골을 노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고 후반 추가시간 3분에 마침내 대표팀의 첫 골이 터졌다. 손흥민은 왼발 중거리 슛을 골로 성공시켜 러시아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이 됐다. 손흥민의 골을 시작으로 대표팀은 동점골을 노렸지만 1 대 2 멕시코의 승리로 경기가 마무리됐다.
대표팀이 앞선 두 경기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인 터라 한국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표팀이 독일을 상대로 ‘대반전’ 시나리오를 완성하자 주요 외신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우승한 디펜딩 챔피언 독일은 한국전 패배로 16강에도 오르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외신은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하면서 한국의 승리가 감동적이었다고 보도했다.
▶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승리에 환호하고 있다. ⓒ연합
미국 매체 데드스핀은 “한국의 퍼포먼스는 월드컵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준다”며 “한국이 90분간 필사적으로 뛰는 모습은 이번 월드컵에서 많은 영감을 줬던 광경 중 하나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충격’이었다. 영국 BBC는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 한국에 패배해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은 대회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전했다. 영국 가디언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 천둥이 치는 하늘 아래 부엉이가 매를 잡는 등의 징조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화창한 대낮에 80년 만에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며 독일이 한국에 패배해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한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묘사했다.
러시아 RT는 “할 말을 잃었다”며 “독일은 월드컵에서 겪은 수모를 믿기 힘들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ESPN은 “월드컵 F조의 험난했던 하루”라며 독일과 우리 팀의 경기와 F조의 다른 경기인 스웨덴과 멕시코의 경기 결과를 함께 전했다.
독일전 승리 주역 3인방
2018 러시아월드컵 독일전은 FIFA 랭킹 57위가 FIFA 랭킹 1위를 꺾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후반 추가시간에 연이어 골이 터져 나온 점, 대표팀이 월드컵 출전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승리라는 점 등 극적인 요소를 고루 갖춘 반전 드라마였다. 대표팀이 일궈낸 반전 드라마 뒤에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지닌 태극전사들이 있었다.
울보 에이스 손흥민
손흥민은 한국 축구 대표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다. 손흥민은 멕시코전과 독일전에서 각각 한 골씩 넣으며 대표팀의 에이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다. 독일전에서는 부상으로 경기에 불참한 기성용을 대신해 주장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 위에 올랐다. 경기 전과 경기 도중 선후배들을 격려하면서 대표팀 분위기를 다잡았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에서 막내로 출전해 1무 2패로 쓴맛을 본 후 눈물을 펑펑 쏟았던 ‘울보’ 손흥민은 독일전 승리 이후에는 동료들을 향한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에이스라는 부담감을 짊어지고 월드컵을 준비하던 손흥민은 “월드컵은 정말 무서운 곳”이라며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망신만 당할 것”이라는 말을 수차례 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손흥민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자책하기도 하고 동료들을 향해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월드컵을 준비했던 손흥민은 독일전뿐 아니라 스웨덴전, 멕시코전에서도 에이스답게 경기장을 누볐다.
K리그 꼴찌 팀 출신 3순위 골키퍼 조현우
조현우는 이번 월드컵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깜짝 스타’다. 김승규, 김진현에 이어 대표팀 3순위 골키퍼였던 조현우는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 장신 공격수를 상대하기 위해 깜짝 기용됐다. 첫 경기부터 눈부신 선방으로 활약한 조현우는 멕시코전, 독일전에서도 골키퍼 장갑을 꼈다. 특히 독일전에서 몇 차례 슈퍼세이브를 선보이며 경기 공식 최우수선수(MOM·맨오브더매치)로 선정됐다.
조현우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K리그 최하위 팀인 대구 소속 조현우는 소속팀이 부진할 때도 선방하며 K리그 팬들을 사로잡았다. 축구팬들은 스페인 골키퍼 다비드 데헤아에 빗대 ‘대구 데헤아’, ‘대헤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신태용 감독의 눈에 든 조현우는 1순위 골키퍼인 김승규가 발목 부상으로 경기 출전이 불가능해지자 지난 2017년 11월 열린 세르비아 평가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매 경기 기복 없는 활약으로 가치를 입증한 조현우는 결국 러시아월드컵에서 빛나는 별이 됐다. 조현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K리그에 돌아가서 좋은 모습을 보인 다음 유럽에도 진출해 한국 골키퍼도 세계 리그에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전했다.
밉상에서 ‘갓영권’으로 김영권
김영권은 독일전 이후 밉상캐릭터에서 단숨에 호감캐릭터로 반전된 선수다. 그는 신태용호 출범 초기부터 가장 고통받은 선수 중 하나였다. 이란과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섰던 김영권은 관중의 환호 탓에 선수들끼리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해서 대표팀 졸전으로 쌓인 대중의 분노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
잠시 대표팀에서도 탈락한 시련의 시간은 김영권에게 약이 됐다. 그는 이번 월드컵에서 이를 악물고 몸을 던져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일전에서는 여러 차례 육탄 수비를 벌인 끝에 선제골의 주인공이 돼 ‘갓영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김영권은 “지난해 받은 비난이 오늘의 자신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비난이 나를 발전하게 했다”는 말을 남겼다.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