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돌 가수가 1위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면 꼭 빼먹지 않는 이름이 있다. 대개 ‘원동력’이라고 치켜세우는, 그들의 ‘팬’이다. 과거 표현에 빗대면 ‘오빠부대’ 또는 ‘빠순이’라고도 하나 이들 표현은 다소 폄훼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각 팬덤은 고유 이름을 정하고 그렇게 불리길 바라며, 그 이름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해오고 있다. 팬덤에 이름을 붙이는 건 이전에도 존재했다지만 조금 달라졌다. 팬덤의 활동 범위는 대폭 넓어졌고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또한 과거에는 부정적인 면이 강했다면, 이제는 때에 따라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팬덤은 음지에서 양지로, 비주류에서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자 팬클럽 ‘아미(ARMY)’가 덩달아 조명받는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아미가 국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등장한 것은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축전에서 “소년들의 날개 아미”라며 그들을 언급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아미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평가하는 등 외국 언론들도 그들의 영향력에 주목했다.
팬덤 이름으로 선행도
아미는 좋아하는 대상자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역할에서 더 나아간 팬덤이다.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콘텐츠 생산’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방탄소년단의 흥행을 뒷받침했다. 한국어로 된 콘텐츠를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거나 뮤직비디오를 보는 해외 팬들의 반응을 촬영한 리액션 영상을 만들고, 재미있는 콘텐츠만 모아 재생산했다. 모바일 시대에서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은 셈인데, 이는 방탄소년단을 더 많이 알리는 데 주효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방탄소년단 역시 다수 매체를 통해 “아미 덕분에 지금의 방탄소년단이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팬덤의 존재가 공공연하게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그룹 워너원의 멤버 강다니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광고가 내걸렸다. ⓒ뉴시스
팬덤의 과감한 활동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서울 지하철 이용자라면 커다란 인물 사진으로 도배된 지하철 내부와 통로 광고판을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해당 인물의 생일을 축하한다거나 새 음반 출시를 기념하는 등 아이돌 팬클럽이 직접 의뢰한 지하철 광고다. 서울교통공사가 2014년부터 2018년 4월까지 집계한 ‘연예인 팬클럽 광고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지하철역에서 집행된 팬클럽 광고 수는 1038건. 2014년 76건과 비교하면 약 14배 늘었다. 2016년(542건)과 견줘도 2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비단 국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K팝의 무대가 해외로 확대된 것처럼 팬들의 활동지도 세계로 향하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옥외 광고판이 그 예다. 이곳 전광판은 글로벌 기업의 제품 광고가 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국내 연예인의 모습이 심심찮게 등장해 현지인들을 놀라게 한다. 미국 포브스는 지난해 말 ‘K팝 팬, 가장 좋아하는 스타를 홍보하기 위한 타임스스퀘어 광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응원하는 연예인의 이름이나 팬덤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사례도 상당하다. ‘연예인의 꽁무니만 뒤쫓는 사람’이 아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이자 사람’으로 진화하는 모습이다. 인기 아이돌 그룹의 한 팬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연예인의 이미지로 대변될 수 있는 요즘인 만큼 건전한 팬덤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저마다 노력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질서정연한 태도로 응원에 임하는 문화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해진 위치에서 공연을 즐기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그곳 쓰레기를 모두 정리하는 게 당연해졌다. 오히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잘못을 했다면 빠르게 인정하고 나서서 사과를 한다. 대중문화 소비자의 한 축으로서의 성숙함을 갖춰가는 모습이다.
때로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지난해 모 그룹 소속 아이돌이 성추행 구설수에 오르자 팬들은 그 가수와 관련해 보이콧을 선언했다. 현재 팬 문화가 과오를 묵인하며 맹목적으로 헌신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히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회적 위상도 달라졌다. 일례로 다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팬덤의 밝은 면모가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한 프로그램에서는 ‘팬덤 문화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 비정상인가요?’라는 주제로 토론을 나눴고,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오랜 팬클럽 생활을 해온 팬의 이야기를 전했다. 팬덤을 주류 문화로 대우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됐음이 엿보인다.
▶ 서울 마포구 소재 라인프렌즈 스토어 방문객들이 방탄소년단 캐릭터 상품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
늦은 새벽 시간,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대로변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궁금해졌다. 이곳에 모인 이유를 묻자 “방탄소년단 굿즈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방탄소년단과 아미를 형상화한 제품을 판매하는 대형 매장 앞이었다. 팬덤을 위한 공간이 보여주듯, 팬덤은 더 이상 음지에 머물지 않는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