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한국 사회는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희망에 부풀어 있다. 정전협정에 사인을 한 당사자들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지난 65년간 지속된 불안정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불안감 역시 적지 않다.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났던 기회가 위기로 급전된 경험을 했던 한국 사회는 2018년 절호의 기회 앞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일본에게서 벗어난 해방이 분단과 전쟁의 위기로, 3저 현상을 통한 경제호황이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은 유신체제의 성립으로,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제1차 북핵 위기로 귀결됐다. 절호의 기회 속에서도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기회를 놓치면서 위기를 경험한 일들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이었다. 1987년을 경험한 사람들은 2016년 12월 광화문광장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6월 민주항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6월은 1980년 ‘서울의 봄’에 경험했던 좌절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시청 앞에 모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이한열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결국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의 정권 연장 음모를 막고 개헌을 통해 민주적 개혁을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6월의 무더위도, 경찰의 최루탄도 시민의 요구를 막지 못했다.
지금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당시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짜릿하면서도 뿌듯하기도 하다.
촛불시위에 참여하면서도 불안감이 적지 않았다. 거대한 시민의 열기는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주었다. 시민의 힘을 확인한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결정 역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흐름이 대통령 선거로 이어졌고, 너무나도 당연히 촛불이 요구했던 사회개혁을 추진할 지도자가 선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1987년 6월의 기억은 ‘우리가 해냈다’는 자신감을 주었지만, 그해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해내면 뭐하나’라는 좌절감과 무기력증을 가져왔다. 비록 5년이 지난 후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이었던 야당과 시민사회의 리더가 세 차례나 연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이후 30년간 한국 사회의 흐름은 1987년 겨울의 좌절과 허망함을 배신하지 않았다. 해결해야만 했고, 해결했어야만 했던 한국 사회의 과제는 1987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나서도 그대로 계속됐고, 오히려 독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다.
해결해야만 했던 시대적 과제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를 놓치면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해야만 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민족반역자로 만들었던 사회구조를 개혁해야 했고, 일본이 일으킨 불의의 전쟁에 복무했던 전쟁범죄에 대해 단죄해야만 했다. 그러나 제헌헌법이 규정하고 있었던 반민특위는 부일전쟁범죄자들이 장악한 정부에 의해 좌절됐고, 60여 년이 지나서야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그 조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때를 놓친 일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식민지 잔재와 전쟁범죄의 문제가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60년이 지나서야 시작된 논의는 모두 정치화됐다. 과거사 해결을 얘기하면 좌파가 되고, 과거사 문제를 덮자고 하면 우파가 됐다. 과거사 문제의 조사와 해결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끊임없이 이 문제를 정치적 프레임 속에 가두려 했고, 이는 결국 진실화해위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한 채 종료되는 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파산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은 자신의 금을 내놓았고, 국회는 청문회를 진행했으며, 정부는 재벌 개혁을 추진했다. 정부는 이러한 전 사회적인 노력을 통해 외환위기를 최단 기간 내에 극복했다고 했지만, 막상 해결됐어야 할 경제구조의 개혁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7년의 개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민의 힘으로 헌법을 바꾸었건만, 시민들이 원했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독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불법적으로 권력과 금력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를 청산함으로써 다시는 인권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독재체제가 나타날 수 없도록 해야만 했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을 앞에서 이끈 정치인들의 분열은 독재 잔재의 청산을 어렵게 했다. 그 시대의 정치인들은 1987년 당시를 주도했던 386세대의 감성이 아닌 독재시대 야당 대표의 감성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고, 결국 실패했다.
돌이켜보면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에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고, 이를 통해 새롭지도 않고 정통 우익도 아닌 ‘뉴라이트’가 등장해 과거를 미화하는 작업이 본격화됐다. 독재 청산의 문제는 또다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1987년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한 이 문제는 2016년과 2017년 촛불집회를 통해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의 교훈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또다시 치르지 않아도 될 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1987년으로부터 30년하고도 또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시대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어쩌면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깨야 한다. 1987년부터 31년이 지나 다시 6월을 맞으면서, 한편으로는 현대사를 통해 네 번이나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한 한국 사회의 역동성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또다시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개혁은 31년 전의 감성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세대의 감성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들의 감성을 통해 다시는 정치적 프레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래세대에게 역사의 짐을 넘겨주고 싶지 않다.
박태균│서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