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팍하고 엉뚱한데 과단성마저 있다. 외람되게도 나의 장인어른 얘기다. 별난 구석이 있는 분이라는 건 진작에 알았다. 양쪽 집안이 상견례를 하는 살얼음판 같은 자리. 날씨 얘기로 포문을 연 후 서로 성씨가 어디며 본관이 어떠한지, 가볍게 상대편 집안을 치켜세워주는 추임새를 곁들여가며 호구조사 성격의 질문을 이어갔다. 그때 장인이 자못 진지하게 운을 뗐다.
“우리는 말이죠, 99퍼센트 경주 김씨입니다.”
그냥 경주 김씨도 아니고, 99퍼센트 경주 김씨는 무슨 소린가. 얘기인즉, 독자(獨子)였던 부친이 일제강점기에 도일(渡日)했다가 해방 이후 귀국하는 바람에 일가친척과의 인연이 끊어져 정확한 근본을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웃을 수도 없고, 침묵할 수도 없고 리액션이 난감했다. 수초 간의 침묵을 깬 것은, 마찬가지로 괴팍하고 엉뚱한데 과단성마저 있는 예비 신부(그러니까 내 아내)였다.
“아빠, 99퍼센트가 더 이상한데, 꼭 그 말을 붙여야 해?”
에피소드는 더 있다. 젊은 시절 낚시에 빠져 위장병에 걸렸다는 얘기, 테니스 치다 위기만 닥치면 탁구의 ‘끊어 치기 타법’을 구사해 시합에서는 불패지만 사람들이 안 놀아준다는 얘기, 목사님한테 졸라서 남들은 음성으로 찬송할 때 (성가대석도 아니고) 예배석에 앉아 생뚱맞게 하모니카 연주를 한다는 얘기 등등.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결합해 하나의 인격이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지 않나. 그런데 낚시랑 위장병이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딱 그렇게 물었을 때 장인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고기가 잡히는데 낚싯대에서 어떻게 손을 떼? 굶어가며 낚시를 하니 위장에 병이 났지.”
하지만 이 괴팍하고 엉뚱한데 과단성마저 있는 장인의 행보 가운데 이번 일만큼 예상을 초월하는 것은 없었다. 며칠 전 나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말이지, 구 서방, 요즘 시를 쓰고 있어. 어젯밤에도 한숨도 안 자고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몰라. 생각이 막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는 곧 있을 지역 문예 공모전을 목표로 시를 쓸 것이니, 문학 전공자인 너희 부부가 참고할 만한 시집을 골라서 당장 부치라고 지시했다. 아내더러는 여태껏 쓴 시들을 이메일로 보낼 테니 다듬어보라는 명령까지 덧붙였다. 아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아빠가 시를 쓰겠다니, 문학이 무슨 우격다짐으로 되는 일이냐고? 보내온 시라는 것도 죄다 신문 논설하고 성경 구절들을 이종교배해서 행갈이만 해놨던데.”
하지만 나는 어이없게도, 장인의 개성과 단박에 결판내는 시라는 장르가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에 야금야금 빠져들었다. 그 생각을 부채질하는 건 작년 추석 그에게 들은 ‘가을의 소회’였다.
“하루는 내가 소파에 앉아서 마당을 보는데 말이야. 까치가 날아오더니 발가락으로 마당을 막 파헤치는 게 아냐. 그러더니 부리에 있는 뭔가를 쏙 넣고 다시 날아가. 궁금해서 바로 나가 봤지. 마당을 파보니까 옥수수 알갱이야.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입에 넣고 먹었어. 근데 며칠 지나서 어이쿠, 그놈이 다시 날아왔네! 여길 파헤치다가 없으니까 저길 파헤치고 또 여길 파헤치고…. 하하하하, 내가 우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미 시심(詩心)을 가진 시인 아닌가. 번지수만 잘 찾으시면 된다고, 나는 그런 마음으로 장인의 다음 시를 기다리고 있다.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