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라는 말이 있다. 익숙한 향을 맡으면 잊고 지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거다. 코로 들어온 향기는 그날의 기억뿐 아니라 감정, 분위기를 모두 한꺼번에 불러온다. 그만큼 후각은 우리가 가진 감각 중 기억을 불러오는 강력한 소환제다.
조향사는 향기란 무엇인지,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사전적 의미는 향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이성민 조향사가 정의 내린 조향사는 사전적 정의와는 방향이 조금 다르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후각적인 경험은 제각각이다. 경험에서 형성된 후각 감수성도 다 다르다. 때문에 조향사는 많은 사람들이 향을 맡았을 때 공감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향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나 관념을 정의 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이 조향사가 만든 향수에는 하나하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이성민 조향사의 향수공방에도 비슷한 글귀가 적혀 있다.
‘기억해내지 않아도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후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정전협정을 맺은 지 벌써 65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고 가족과 헤어졌던 젊은이들은 이젠 흰머리가 지긋한 노인이 됐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 두고 온 가족을 추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이성민 조향사가 만든 ‘통일향수’는 다섯가지 사연을 재료로 만들었다. ⓒC영상미디어
통일향수는 통일부와 이 조향사가 이산가족 어르신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함께한 프로젝트다. 통일향수의 향수는 ‘고향 향(鄕)’ 자에 ‘물 수(水)’ 자를 쓴다. 노스탤지어를 향수로 달랜다는 뜻이다. 보통 향기가 기억을 남기지만 통일향수는 역으로 기억을 더듬어 고향의 향을 재현해낸다는 의미를 담았다.
“북한은 우리에게 가볼 수 없는, 미지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어떻게 그리움을 향으로 재현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곳도 남쪽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도 어릴 때 자란 곳에서 겪었던 추억이 하나씩 있잖아요. 시간과 공간만 조금 차이가 날 뿐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어르신들에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업이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통일향수는 이산가족의 기억을 원료로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향을 재현했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 노스탤지어가 담겼다. 함경도 이재순 할머니의 ‘명사십리 해당화 향’과 이주경 할아버지의 ‘한여름 산딸기 향’, 평안도 김형석 할아버지의 ‘대동강 솔 향’과 김혁 할아버지의 ‘옥수수 향의 추억’, 황해도 송용순 할머니의 ‘해주 바다 내음’이다.
아픈 기억이 향수로 다시 태어나다
이재순 할머니의 사연이 담긴 ‘명사십리’는 원산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갈마반도 바다 기슭에 있는 흰 모래터다. 명사십리의 해당화는 한반도에서 자라는 토종 장미다. 여리고 잔잔한 장미향을 머금은 해당화에는 이 할머니와 오빠의 추억이 담겨 있다. 함경도에 살던 할머니는 흥남부두에서 백 리는 떨어진 명사십리로 오빠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당시 붉게 만발한 해당화가 탐스럽고 예뻐서 만지려고 다가가려는 찰나에 오빠가 꽃을 대신 꺾어줬다. 동생의 여린 손이 행여나 해당화 잔가시에 찔릴까 봐 걱정이 돼서다. 동생을 아꼈던 오빠는 전쟁 이후 북에 홀로 남았고 지금은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다.
안타까운 다섯 가지 사연이 담긴 통일향수는 작년 11월 29일 경기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열린 ‘통일향수전’에서 처음 소개됐다. 오빠와의 추억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할머니는 ‘명사십리 해당화’ 향이 코에 닿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이 할머니뿐 아니었다. 저마다 북녘 땅에 추억을 두고 온 어르신들 대부분이 눈시울을 붉혔다.
“어르신들이 향수 향을 맡으면서 우시는 모습을 보니까 안타깝기도 하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분들이 조금이나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하셨거든요. 조향사로서 보람 있는 작업 중 하나였어요.”
▶ 4월 26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MPC)에서 열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통일향수전’을 찾은 관람객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작년 11월 통일전망대, 12월 서울 중구 ‘시민누리공간 무교’에서 두 차례 소개된 통일향수는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2018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지난 4월 2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통일향수전’이 열렸다.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 시점이었다. 뜻깊은 순간 이산가족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리는 프레스센터에 있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역사에도 뜻깊은 일이잖아요. 남북한 모두에 의미 있는 일로 통일향수가 다시 한 번 조명받아 기쁩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할 이유를 향수에 담긴 어르신들의 사연으로 전 세계에 알렸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