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BC 428~BC 347)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다. 그의 스승은 소크라테스이고, 그의 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세 사람은 유럽 철학의 원류를 형성한 철학자들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과 연관된 일들이 아테네의 정치 상황과 관련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플라톤이 스물아홉 살이었을 때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 제국’과 ‘스파르타 동맹국’ 사이의 전쟁으로, 아테네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 죄목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실제적 이유는 ‘반역’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그는 전쟁을 반대하고 스파르타와 협상할 것을 주장했다. 아테네가 전쟁에서 패배하자 정치인들은 패배의 책임을 협상파에 돌리고자 했다. 그래서 협상파의 지도적인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기소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정치적 사건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파탄을 의미했다. 그것은 아테네의 쇠퇴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아테네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아테네를 떠났다.
플라톤이 아테네로 다시 돌아온 것은 마흔 살 무렵이었다. 그는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아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 열일곱 살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학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0여 년간 그곳에서 배우고 플라톤이 세상을 떠나자 아카데미아를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의 초청을 받아 마케도니아로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왕자를 가르쳤다. 그때 그가 한 말 중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다. 왕이 될 사람일지라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이 된 후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섰다. 이때 아테네가 멸망했다.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가르쳤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아테네 시민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테네를 떠난 지 석 달 만에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플라톤은 만년에 <국가>를 썼다. 아테네가 급격히 쇠퇴하고 있던 때였다. 플라톤은 아테네가 활력을 되찾기 바랐고, 그 바람은 ‘이상국가’의 제시로 나타났다. 그는 국가에 세 신분이 있다고 했다. 평민과 수호자 그리고 통치자다. 그런데 그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세 신분을 혈통에 따라 나누지 않았다. 즉, 세습되는 신분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 신분은 능력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모든 자유민의 아이들을 모아 동등한 교육을 한다. 아이들은 체육, 음악, 수학, 역사, 과학 등을 교육받는다. 아이들은 스무 살 청년이 되었을 때 시험을 보아야 한다. 이때 시험에 떨어진 청년들은 상인, 점원, 노동자, 농민 등과 같은 평민 신분이 된다.
시험에 합격한 청년들은 다시 10년간 교육을 받는다. 이번 교육과 훈련의 주 내용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성격에 대한 것이다. 10년 후, 서른 살이 된 청년들은 다시 시험을 보아야 한다. 이 시험에서 떨어진 청년들은 국가의 행정관이나 군 장교가 된다. 그들은 수호자 신분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
두 번에 걸친 시험에 합격한 청년들은 다시 교육을 받는다. 이번 교육의 주 내용은 철학이다. 청년들은 5년간 철학을 공부한 후, 다시 15년간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배워야 한다. 어느덧 청년은 쉰 살의 중년이 된다. 이렇게 50년간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통치자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
플라톤은 고대 시대 사람이다. 그는 그 시대의 신분질서, 사회질서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통치자, 수호자, 평민의 세 신분으로 사람들을 나누었고, 교육 대상에서 여자아이, 노예나 외국인의 아이를 제외했다. 이런 한계가 분명하지만,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플라톤이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플라톤이 제시한 세 가지 덕목은 ‘절제’와 ‘용기’ 그리고 ‘지혜’다. 생산을 담당하는 평민은 과도한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절제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는 수호자에게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지혜로워야 한다. 전통과 경험 그리고 교양을 합친 지혜가 있어야 나라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세 가지 덕목이 길러진다고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신분에 따라 덕목이 달라진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세 덕목을 두루 갖춰야 한다. 교육과 훈련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노력을 통해 그 덕목들을 갖출 수 있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공자의 정치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논어>의 ‘안연’ 편에 보면 지위에 맞는 역할을 강조하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은 임금 노릇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 노릇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경공은 무려 58년간 재위한 제후였다. 그는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한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이고 형벌을 가혹하게 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슬퍼하는 백성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따끔하게 충고했다.
임금은 어진 정치를 해야 하고, 신하는 사욕을 버리고 헌신해야 한다. 어버이는 사랑으로 자식을 기르고, 자식은 존경의 마음으로 어버이를 대해야 한다. 그러면 바람직한 나라가 된다. 공자는 지위에 맞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자의 말에 대한 제경공의 답도 주목해보자. 제경공은 “훌륭한 말씀입니다.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고, 어버이가 어버이 노릇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공자가 지위에 맞는 행위를 강조한 것이라면, 제경공의 대답은 ‘일탈’에 대한 경계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제경공의 말까지 기록한 이유일 것이다. 지위에 맞지 않는 일탈 행위를 하면 밥조차 얻어먹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플라톤이 세 가지 덕목을 강조한 것 또한 일탈 행위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일탈 행위를 하지 않으려면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은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했다는 말은 두고두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나는 매일 나 자신에 대해 세 가지를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할 때 내 마음을 다했는가, 벗을 사귈 때 성실하게 하였는가, 배운 것을 몸으로 익혀 그대로 실천했는가.”
항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말이다.
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