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가끔은 불쑥 떠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콕 처박혀 지내는 생활 또한 몹시 좋아하고 잘 해낸다. 말하자면 집 밖도 좋고, 집 안은 더 좋다. 어쩌면 유랑보다는 정주 체질에 가깝다고나 할까.
모임에 나가서도 1차니 2차니 장소를 옮겨 다니기보다 붙박이 모양 한자리에 진득이 앉아 뭉개는 쪽이 편하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여장을 풀 때도, 설령 내일 아침 급히 짐을 꾸릴지언정 트렁크 속의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제 위치를 잡아줘야 안정이 된다. 마치 한동안 그곳에 눌러 살 사람처럼.
일정에 따라 총총히 움직이는 행사나 단체 여행도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요란스럽게 감탄하며 셔터를 눌러대는 것도, 풍광을 배경으로 프레임 안에 갇히는 것도 별로다. 관광명소나 기념품에 맹렬한 호기심이 일지도 않는다. 그저 주머니에 두 손 찔러 넣은 채 천천히 산책이나 하게 내버려둔다면 좀 좋을까마는.
이를테면 길가의 상점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 말갛게 닦인 쇼윈도에 자신의 옆모습을 슬쩍슬쩍 비쳐보는 젊은 여성의 걸음걸이, 그늘 짙은 가로수 아래 무심히 내다놓은 낡은 의자, 창가에 내걸린 붉은 제라늄 화분, 어느 가게 앞을 지날 때 맡게 되는 진한 커피 향과 구수한 빵 냄새… 그런 일상의 풍경들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것이다. 잠시 스쳐가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곳에서 몇 년째 살고 있는 거주민이기라도 하듯.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 ‘떠나고 싶다’와 ‘머물고 싶다’ 사이의 그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낯선 곳에서, 머물고 싶다’는 동시적 소망. 남쪽의 몇몇 섬들과 해안도시들, 내륙의 고즈넉한 산간 마을들, 서쪽의 해 지는 포구들…의 사계절을 자주 떠올렸다. 아이가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나면 곳곳을 돌아가며 1년 내지 2년 정도씩 살아보리라, 야무지게 다짐한 적도 있다.
정작 아이가 독립하고 난 뒤에도 나는, 낯선 곳에서의 삶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 꿈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다. 조금씩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꿈. 아마도 실현 가능성보다 실현 의지가 턱없이 부족했을 꿈.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들에 발목 잡혀 사는 인생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리고 이제는 그다지 아쉽지도 않다. 꼭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이 아닌들 어떠랴. 낯선 장소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익숙한 장소가 문득 한없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멀리 오래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면 어떻고, 한나절 외출이면 또 어떠랴. 잠깐 잠깐 바람 쐬고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환기가 된다면.
강추위와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겨울이 물러간 듯싶다. 때맞춰 남쪽에서부터 꽃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노란 복수초가 언 땅을 뚫고, 연분홍빛 매화가 수줍게 몸을 열고, 생강나무 꽃눈은 금세라도 터질 듯 물이 올랐다는 전언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날은 온다.
훌쩍 어딘가로 나서고 싶은 계절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유독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괜히 집 밖으로 나돌고 싶어 발바닥이 근질거리고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생수와 커피와 김밥 한 줄을 배낭에 채우고 어디 고궁이나 박물관에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떠나고 싶다’와 ‘머물고 싶다’ 사이 그 어디쯤의 대안으로, 언제든 가볍게 달려가곤 하는 도심의 여행지들로.
익숙한 듯 낯선 그곳에서 반나절쯤이라도 머물다 돌아오면 이 싱숭생숭한 봄날, 잠잠히 지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내일이라도 당장!
정길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