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은희 씨는 열네 살부터 은공예를 시작했다. 은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드리며 하루도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 손의 상처는 가계를 책임져온 훈장이 됐다. 일을 할수록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게 가족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은공예를 권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아들 이동현 씨는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업을 잇는 게 멋있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어깨너머로 봐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그는 인문계에서 예체능계로 진로를 바꾸고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다. 이 부자, 시쳇말로 ‘레알 은수저’ 집안이 됐다.
ⓒC영상미디어
아들 동현 씨는 학교에서 배운 이상과 작업장의 현실이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만든 걸 사람들이 기분 좋게 사용하겠구나’라는 기대감이 이상이었다면 똑같은 제품을 1000개씩 만들어야 하는 노동 현장이 현실이었다. 동현 씨는 이 지루함을 견딜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동시에 아버지가 수십 년간 묵묵히 이 일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더욱 욕심이 커졌다.
은공예의 전성기는 1980~1990년대였다. 그때만 해도 은수저 세트가 혼수품에서 빠지지 않는 품목이었다. 동현 씨는 이 점에 주목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 나름의 노하우로 경영을 해왔지만 은공예 시장이 주춤한 때에 치열한 마케팅·영업 경쟁이 필요해 보였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손님들이 몰라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존 시장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해외 시장을 두드렸다. 누리집을 구축하고 홍보 영상을 제작했다.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디자인 트렌드를 읽었다. 다양한 정부 지원 사업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가 대우공방의 외연을 넓히는 데 주력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아버지가 쌓아온 기술력이 있었다.
아들이 합류하고 경영 방식에 확연한 차이가 생겼다. 아버지 은희 씨는 “기술 외적인 면에서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정보에 약한데 그런 면을 아들이 보완해주고 있어요. 믿음직스럽죠. 반면 저처럼 야근을 할 줄 알았는데 어떤 직원보다 ‘칼퇴근’ 하더라고요. 가족이라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남보다 더 해요”라며 웃었다.
이런 은수저가 어디 또 있을까. 아버지에게 아들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은수저’다. 대우공방은 독립 브랜드 ‘은이요’를 론칭하고 온라인 판매를 개시했다. 차차 금속함, 은그릇을 중심으로 한 프리미엄 브랜드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동현 씨는 자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 때까지 가업이 이어지길 바란다. 100년을 향한 은수저 부자의 도약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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