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임금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뒤를 이어 661년 즉위해 681년까지 20년간 재위했다. 이때 삼국통일이 이뤄졌다.
삼국통일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660년에 백제가, 그 8년 뒤인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당나라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했다.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다. 당나라는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려고 공주에 웅진도독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특히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신라마저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안동도호부의 총관 설인귀는 신라가 당나라에 충성하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협박했다.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편지를 보냈다. “장군께서는 영웅의 기운을 타고나셨고 재상의 덕을 겸비한 분이시니, 천벌을 내리시기 전에 사정을 살펴달라”고 했다. 설인귀를 추켜세우며 통사정을 했던 것이다. 신라는 결코 당나라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여러 차례 했다.
문무왕은 당나라 황제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황제께서는 태양 같은 밝은 덕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래서 동식물에게도 은혜를 베풀고, 곤충조차 사랑하며, 물고기조차 죽이지 않으십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어 제 몸뚱이를 보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자신은 동식물, 곤충, 물고기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니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이었다.
문무왕의 자세를 두고 수치스럽다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한 외교의 일환이었다. 객기를 부려 나라가 없어지는 불행을 자초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무왕은 외교를 통해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사전에 막아냈다.
다른 한편으로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완수 작업을 착실히 진행했다. 문무왕은 “평양 이남과 백제의 땅은 모두 신라가 다스린다”는 것이 합의 사항임을 당나라에 환기시켰다. 아울러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당나라 군대를 서서히 몰아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40여 차례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문무왕 15년(675년)에 백제의 땅을 회복하고 평양 이남에 주와 군을 설치했다. 그다음 해에 북쪽 경계를 침입한 당나라 군대를 몰아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삼국통일이 이뤄졌다. 문무왕이 수모를 견디며 외교를 하면서 당나라 군대를 차근차근 몰아낸 성과였다.
문무왕은 죽음에 임박해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평가했다.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룬 것을 자랑하지 않았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덕이 넘치는 곳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했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평화가 필요했다.
문무왕의 말에서 평화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평화는 일상의 삶과 직결된 것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문무왕이 객기를 부렸다면 평화를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로 인해 백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평화는 흔히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시련이나 수난을 겪을 때에야 평화를 떠올리게 된다. 일상의 삶에서는 평화의 중요성이 쉽게 간과되기도 한다. 그러나 평화를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그 정의는 현상적인 측면만을 지적한 것이다.
한용운은 <조선독립의 서>에서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고,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다”라고 했다.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때의 시인이자 승려이고 또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서양 문명을 배워 개화하자는 주장이 횡행할 때 외세를 배척하자는 동학운동에 가담했다. 신문명을 배워야 한다며 수많은 지식인이 일본으로 몰려갈 때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되어 오세암에 머무를 때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했다. 한용운은 “승려로서 대중에게 가자”며 산에서 내려와 민족 독립을 위해 분투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독립선언서>에 첨부된 공약 3장을 썼다. 그 때문에 체포되어 검사 심문을 받을 때, 한용운은 <조선독립의 서>를 써서 검사의 심문에 답했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 즉 모든 것의 본성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글을 보자.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공통된 본성”이라고 했다. 독립운동은 인류의 본성인 자유를 찾고자 함이니 당연한 행동이라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은 ‘자기 민족’만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에 붙인 공약 3장에서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고 했다. 자유는 만물의 본성이므로 누구나 누려야 하고, 모든 민족이 함께 누려야 한다. 모든 민족이 함께 자유를 누릴 때 평화가 이뤄진다. 그래서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다.”
한용운은 평화를 적극적으로 정의했다. 단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누구나 함께, 전 인류가 행복한 상태가 평화라고 했다.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평화는 단지 수단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목적이 된다. 평화는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평화는 일상의 삶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한용운은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오세암으로 갔다. 산속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중국 고승 상찰이 지은 <십현담>을 풀이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한용운은 2년간 성찰의 시간을 가진 뒤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하며 대중 속으로 돌아왔다.
<십현담주해>에 실린 다음의 구절이 소중하다. “넓은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들은 본래 스스로 만족함을 갖추고 있지만, 일체의 성현은 도(道)가 깨져서 얻을 수 없다.” 보통의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성현이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이 가진 모든 지혜를 모아낼 수 없다. 따라서 성현이라고 우쭐댈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 구절을 보충 설명하면서 “가르침의 스승인 조사(祖師)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조사란 불교에서 종파를 세운 고승을 의미한다. 그렇듯 대단한 조사일지라도 그 가르침은 별것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지혜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한용운이 말하고자 한 것은 보통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왜소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한용운은 보통 사람들이 가진 자유에 대한 열망이 민족 독립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님의 침묵>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라고 희망을 노래했다.
자유가 본성에서 나온 열망이라면 평화는 행복을 향한 갈망이다. 보통 사람들의 갈망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이 바뀌면 보통 사람들의 삶은 달라진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자유를 가져오듯, 평화에 대한 갈망이 평화를 낳는다. 평화에 대한 바람을 잃지 않는다면 평화는 이루어진다. 평화는 일상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평화가 곧 행복이기 때문이다.
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