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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신이 이 정도쯤은 돼야

2018.03.25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는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다. 곡식을 재배하기에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이어서 척박한 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올리브와 포도를 많이 기른다. 그리스인들의 주식이 빵과 올리브, 포도주라는 점을 생각하면 올리브와 포도에 대한 이들의 애정이 어떠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이런 애정은 신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신화 미술 작품에도 포도와 올리브가 자주 등장하게 만들었다.

먼저 포도 또는 포도주와 관련된 신화를 보자. 포도주의 신은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에서는 바쿠스)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婚外子)’였다.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는데, 그녀의 저주로 디오니소스는 광기에 싸여 각지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고난의 행군’ 같은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가 간 곳마다 포도 재배법이 전해지는 이득도 있었다. 포도주의 신답게 그를 모시는 의식은 입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열광적인 것이었다. 서양화가들은 광란의 의식과 행렬을 그리거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근원적 존재로서 디오니소스를 즐겨 표현했다.

루벤스,바쿠스

▶ 루벤스, ‘바쿠스’, 1638~1640, 캔버스에 유채, 191x161.3cm,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박물관

루벤스의 ‘바쿠스’는 술의 신으로서 디오니소스를 그린 것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이채로운 것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디오니소스를 매우 살이 찐 존재로 그렸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래 디오니소스는 대체로 늘씬한 체격의 청년으로 그려지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루벤스는 그런 전통을 싹 무시하고 그를 꽤 몸무게가 나가는 둔중한 존재로 그렸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감이 난다. 술의 신(게다가 풍요의 신이기도 하다)이 이 정도는 돼야 세상에 자신의 명함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루벤스의 디오니소스는 지금 술잔을 위로 치켜들고 있다. 아직 술을 다 받기 전에 잔을 드니 술을 따르는 여인이 그만큼 술병을 높이 들 수밖에 없다. 디오니소스의 이런 태도는 단순히 술을 즐기는 존재의 차원을 넘어 자신이 이 시공간의 주재자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곳은 포도주의 땅, 술이 넘쳐나는 곳, 술이 잔 밖으로 흐른다 해도 아까울 게 없다. 자, 해방과 즐거움을 원하는 이들이여, 나의 땅에서 마음껏 이 순간을 즐겨라, 그렇게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오는 것 같다. 루벤스 만년의 원숙한 터치가 돋보이는 가운데 넘치는 술만큼이나 풍요로운 화면 풍경이 인상적이다.

디오니소스 오른쪽에는 술을 항아리째 들어 마시는 사티로스가 보인다. 그의 얼굴은 이미 불콰해졌다. 그 아래 오줌을 누는 아이가 있고 맞은편에는 술잔에서 떨어지는 술을 받아 마시는 아이가 있다. 어찌 보면 규율도 규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디오니소스의 땅이 얼마나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곳인지를 강조하는 장치일 뿐이다. 루벤스는 이 그림을 주문 받아 그리지 않았다. 스스로 좋아서 그린 것이다. 그만큼 자유로운 의식으로 주제를 풀어놓았다.

노엘 알레_포세이돈과 아테나의 분쟁

▶ 노엘 알레, ‘포세이돈과 아테나의 분쟁’, 18세기, 캔버스에 유채, 156x197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번에는 올리브와 관련된 신화로 눈길을 돌려보자. 그리스인들에게 올리브는 아테나 여신의 선물이다. 신화에 따르면, 오랜 옛날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지역을 놓고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다툼을 벌였다. 이 도시를 누구 관할 아래 둘 것인가를 놓고 겨루다가 결국 사람들에게(또는 신들에게) 판단을 맡겼다. 프랑스 화가 노엘 알레의 ‘포세이돈과 아테나의 분쟁’은 이 장면을 그린 것으로, 역동적인 화면 구성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두 신의 겨루기에서 승자는 아테나였다. 그림에서 아테나 여신이 더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테나 왼쪽으로 올리브 나무가 있는데, 이는 아테나가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은 이유였다. 아테나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올리브 나무가 솟아나게 해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포세이돈도 사람들에게 선물을 제시했지만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의 선물은 아크로폴리스 암반에서 물이 솟아나게 한 것이었다(또는 말을 선물로 주었다고도 한다). 포세이돈이 바다의 신인 까닭에 그가 준 물이 짜서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포세이돈 오른쪽에 말이 보이고 그의 발아래는 커다란 조가비와 물이 보인다. 바다에서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제왕이지만, 민심을 얻는 데 실패한 그는 지금 실망한 눈초리로 아테나를 바라보고 있다. 반대로 포세이돈을 내려다보는 아테나의 표정은 여유만만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이 도시에 내릴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올리브를 택한 것은 매우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올리브는 요구르트, 양배추와 더불어 서양의 3대 장수식품으로 꼽힌다. 건강 식단으로 유명한 지중해 식단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올리브유를 많이 섭취한다는 것이다. 올리브유에는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하다. 이렇듯 선택을 잘한 아테네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의 보호 아래 서양 문명의 깊고 너른 뿌리를 이뤘다.

 

미술평론가 이주헌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미술 담당 기자를 거쳐 학고재 관장을 지냈다.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내 마음속의 그림>,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이주헌의 아트카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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