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 현장 사진 한 장과 그 사연을 소개해달라는 말에, 나는 두툼한 화첩에서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망설이지 않고 뽑아 들었다. 이 화첩에는 네 명의 역대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이 ‘밥퍼’ 활동을 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오거나 함께 ‘밥퍼’ 활동을 하며 찍은 사진들도 있다. 하지만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또렷한 기억의 주인공은 이 땅에서 가장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노숙인이다.
꼭 30년 전인 1988년 겨울이었다. 철거된 무허가 건물 잔해 속에서 추위에 벌벌 떠는 세 명의 노숙인이 있었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길에서 얼어 죽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다른 이로부터 도움을 받던 삶에서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바로 밥퍼의 자원봉사자 이차술 형제와 찍은 사진이다.
1988년 겨울 철거된 무허가 건물 옆을 지나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인데 여기서 떨지 말고 따뜻한 온기가 있는 교회에라도 한번 가보시지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 말에 그들은 “교회에 가도 동전 몇 푼 쥐어주곤 다른 곳에 가보라고 한다”며 “밖은 추우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교회가 한 곳도 없어요”라고 했다. 이 말에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 역시 교회 가는 걸 포기하고 청량리 쌍굴다리 아래에서 세 명의 노숙인과 함께했다. 서로 언 손을 입김을 불어 녹였다. 앉은 자리에 촛불 하나를 간신히 켜놓고 함께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추위를 견뎌냈다. 이들과 함께한 그날 밤으로 나의 인생은 달라졌다. 지금까지 30년째 이어지고 있는 다일공동체의 길거리 크리스마스 예배의 시작이자 오늘날 ‘밥퍼’로 알려진 노숙자를 위한 무료 식사 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사실 이 일이 있고 몇 년 동안은 나와 공동체 가족들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면서 정부 고위공무원도 현장을 함께하겠다며 찾아왔고, 지금은 종교의 의미와 본질을 깨닫게 한다며 대형 기독교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뜻을 함께하고 있다.
30년 전 교회에서 쫓겨난 세 명의 노숙인과 함께 거리에서 드리던 크리스마스 예배가 지금까지 이어지며 사회 각계각층에서 다일공동체와 함께 따뜻한 마음을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무료 식사인 밥퍼 활동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자리를 잡았고, 많은 사람이 낮은 곳에서 서로를 위해 나누는 기쁨을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실 다일공동체와 밥퍼 활동의 현장은 역대 대통령들과 대통령 후보들이 한 번 이상은 다녀가는 곳이 됐다. 하지만 다일공동체는 이들보다 더욱 소중하고 감동적인, 우리 시대 작은 자라고 불리는 소외된 이웃들이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일어서기를 하는 현장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대통령이나 무의탁 노인이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고 귀하다. 초막이든 궁궐이든, 귀한 생명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사랑의 나눔이 이뤄지는 현장이 천국이다. 사랑의 나눔은 없고 미움과 싸움만 있으면 대저택 궁궐이라도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이 사진은 내게 사랑의 나눔을 시작하게 한 작지만 소중한 기억이다.
최일도│다일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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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