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양 미술 하면, 우리는 모네나 르누아르의 인상파 미술 또는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미술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더불어 밀레와 쿠르베의 자연주의가 낯익다. 이 미술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발원한 것이다. 이들 프랑스 미술에 비해 같은 시대의 영국 미술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영국 미술에서도 19세기는 중요한 발흥의 시기였다. 대체로 로맨틱하고 절충적인 성격이 강했던 이 시기의 영국 회화를 우리는 ‘빅토리아조의 회화(Victorian Painting)’라고 부른다. 1819년에 태어나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가 이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빅토리아조의 회화’란 말은 인상파나 자연주의 같은 사조 또는 양식의 개념을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시대 구분을 위해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는 ‘감상(感傷)에 치우친 미술’이라는 다소 경멸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시기였는데도 확실히 빅토리아조의 회화들은 상당히 센티멘털하다. ‘센티멘털리즘’은 곧잘 통속적이고 저차원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미술사가 지금까지 빅토리아조 회화를 푸대접해온 이유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그 로맨티시즘과 절충성, 대중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로 인해 재부상하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이 로렌스 앨머 태디머(1836~1912)다.
▶ ‘테피다리움에서’, 1881, 나무에 유채 24.1x33cm,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 ‘라이벌’, 1893, 캔버스에 유채45.7x63.5cm, 브리스톨 미술관
‘라이벌’과 ‘테피다리움에서’가 대표작
앨머 태디머는 후기 빅토리아조 화가들 가운데 당대에 가장 인기가 있던 화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836년 네덜란드 드론리프에서 태어났다. 불과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일찍부터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 보여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벨기에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그림이 영국인에게 큰 호소력을 가지자 1870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사별한 아내에 이어 두 번째 부인이 될 로라 엡스가 런던에 거주하는 영국인이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그의 영국행을 재촉한 측면도 있었다. 이후 1899년 기사 작위를 받기까지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빅토리아조 회화의 감수성을 표현해냈다.
앨머 태디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라이벌’(1893)이다. 저 멀리 청명한 하늘이 펼쳐지고 바다도 그 못지않은 벽색을 자랑하고 있다. 빛이 기세를 한풀 꺾고 들어오는, 차분하면서도 화사한 로마의 한 실내에서 소녀들과 꽃, 그리고 대리석 조각이 서로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다. 낙원이라고나 해야 할까, 맑고 투명한 공기와 우리의 눈에 포만감을 가져다주는 화려한 색채는 우리에게 얼른 그림 속의 장소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제목이 ‘라이벌’이다 보니 자연히 우리의 시선은 그림 속의 두 여인에게 쏠린다. 고대 로마인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두 여인에게서는 현대 여성의 당차고도 개방적인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지중해의 평화 속에서 이 매력적인 두 여인이 경쟁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사랑의 경쟁일 것이다. 맨 왼쪽의 아이 조각이 사랑의 신 큐피드인 까닭에 우리는 그림 속의 상황을 그렇게 단정할 수 있다. 단지 큐피드가 얼굴에 쓰고 노는 것이 비극의 가면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경쟁의 결말을 다소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삼각관계의 두 꼭짓점인 여인들과 이어지는 다른 한 꼭짓점, 남자는 어디 있나? 오른쪽 발만 보이는 대리석 조각이 지금 보이지 않는 그 남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마치 가만히 앉아 두 여인의 경쟁을 즐기는 듯한 대리석 조각. 이런 포즈의 고전 조각들을 놓고 유추해보건대, 그는 검투사 아니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쿠스) 같다. 오늘날로 치자면 전자는 스포츠 스타, 후자는 연예계의 스타쯤 된다고나 할까? 소녀들이 동경할 만한 멋진 남성이다.
분명 이 여인들 가슴에는 사랑의 울렁거림과 그리움, 질투가 흐르고 있다. 봄도, 사랑도 제철만 되면 그럴 수 없이 밝고 화사한 빛으로 다가오지만, 그것들이 다가올 때면 우리의 마음 또한 그럴 수 없는 흔들림과 동경, 불안으로 동요하게 된다. 그리고 나비들 사이에서, 그리고 꽃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그 섭리가 나른하도록 아름다운 낙원에서 펼쳐지는 것, 그것은 모두가 꿈꾸는 가장 로맨틱한 행복의 표정이다.
이 그림이 시사하듯 앨머 태디머는 주로 고대 로마를 그림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당대보다는 고대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보다 로맨틱한 정서와 관능적인 조형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런 추구의 대표적인 결실이 ‘테피다리움에서’(1881)다.
당대보다는 고대를, 로맨틱한 정서와 관능적인 조형을
그림의 주인공은 목욕을 끝낸 뒤 편안히 쉬고 있는 고대 로마의 여인이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고 입술은 반쯤 열려 있다. 여인이 눈을 감고 입을 반쯤 벌렸다는 것은 그녀가 지금 일종의 무아경으로 빠져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오른손에는 몸긁개(strigil)가 들려 있고 왼손에는 타조 깃털로 만든 부채가 들려 있다. 몸긁개는 고대인들이 때를 벗기는 데 쓰던 도구다. 땀을 내거나 올리브기름을 묻힌 뒤 몸긁개로 몸의 때를 밀어냈는데, 그녀가 하릴없이 움켜쥐고 있는 그 물건은 생김새가 왠지 남성의 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녀의 앞부분을 가리고 있는 타조 깃털 부채는 오히려 그 깃털 모양으로 여성의 성을 더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거기에 곰의 가죽과 꽃이 빚어내는 대립과 조화는 그 자체로 ‘야수와 미녀’ 식의 성적 연상을 자아낸다. 다양한 시각적·촉각적 자극으로 에로티시즘을 부각시킨 회화라 하겠다.
이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테피다리움’은 고대 로마의 온욕실(溫浴室)을 뜻한다. 온욕실은 열탕과 냉탕 사이에 있었는데, 화가는 이 욕실을 그리기 위해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과 폼페이의 고대 목욕장을 직접 답사하고 고고학자처럼 하나하나 관찰해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배경이나 소품은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고증에 기초한 것이라 하겠다. 이 그림뿐 아니라 대부분의 그림에서 앨머 태디머는 고증을 매우 중시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그림의 고객인 당시 영국의 중산층이 대부분 고전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를테면 오페라 전곡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대중에게 친숙한 아리아 한 곡을 연주하듯 그렇게 감각적이고 통속적으로 고대 주제를 소화해 표현했다. 물론 이는 그가 고전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그림을 통해 앨머 태디머는 고대 로마의 중산층이나 당대 영국의 중산층이나 삶의 애환과 정서의 측면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늘 옛 로마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와 같은 격정과 감상에 흔들리며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세계를 제패한 대영제국의 자부심과 풍요, 그리고 그에 기초한 관능과 향락까지 앨머 태디머는 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통해 매우 세련되게 표현했다. 앨머 태디머에게 영국의 영광은 로마의 영광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특히 타락으로 멸망했다는 로마의 관능마저 자기 시대의 관능으로 동경하고 자연스레 표현해냄으로써 당대인들에게 무한한 감각적 풍요를 안겨주었다. 그런 만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는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물론 그의 사후 빅토리아 시대의 감성과 예술이 평가 절하되면서 그의 예술도 크게 평가 절하된 시기가 있었다. 그 평가의 변동을 작품 가격으로 좇아보자면, 1904년 완성 직후 5250파운드(2015년 환율로 852만 원)에 팔렸던 ‘모세의 발견’이 1935년에 861파운드, 56년이 흐른 1960년에 252파운드(41만 원)까지 내려갔다가, 1995년 175만 달러, 2010년에 3590만 달러(388억 원)까지 오르는 등 급락과 급등의 엄청난 격변을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 인상파 대가들의 대표작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나, 소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전위미술의 승리’ 뒤 지나치게 폄하됐던 평가로부터는 엄청나게 회복된 셈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미술 담당 기자를 거쳐 학고재 관장을 지냈다.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내 마음 속의 그림>,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이주헌의 아트카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