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컷] 희망과 도전의 공 다시 던질 수 있다면

2018.01.02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시구하는 윤영미 전 아나운서

1994년 서울방송 아나운서 시절이었다. 젊은 여자 아나운서들이 밀려들어오는데 30대가 되고 나니 위기감이 들었다. 나이 든 여자 아나운서는 퇴물처럼 여기는 풍조가 공공연했던 때였다. 가뜩이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에 뭔가 하지 않으면 위기가 올 것이라 판단했다.

임팩트, 임팩트를 되뇌며 무엇을 할까 방향을 찾던 중 스포츠 캐스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축구, 야구, 농구 같은 다이내믹한 스포츠 중계를 하고 싶었다. 물론 관련 상식은 하나도 없었다. 스포츠 중계는 연예인들이 노리지 않는 분야라는 것만 생각하고 덤벼들었다. 세 종목 중 가장 인기 많고 팬도 많은 야구를 택했다. 야구에 대해선 정말 백지였지만 1년 중 6개월을 중계할 수 있다는 점 단 하나가 선택의 이유였다.

최동원 선수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일자무식이니 우선 공부부터 해야 했다. 새벽 뉴스를 마치고 근무하다가 오후에 퇴근하면, 곧장 야구장으로 달려가는 나날이 시작됐다. 집에 가서도 잠을 줄여가며 책을 보고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경기 비디오를 수없이 돌려봤다. 마치 고시공부 하듯 매달리다 보니 그해 1년 새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을 정도였다.

독학 1년째를 맞은 봄, 어느 날 선배인 이계진 아나운서국장의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야구 공부를 하고 다닌다며? 이번 시범경기에 가서 중계 녹음 해갖고 와봐.”

10만 원을 쥐어주며 대전구장에 다녀오라는 국장의 명령. 펄펄 날듯이 기쁘기도 한 한편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두렵기도 했다. 긴장을 애써 숨기며 외야석에 자리 잡고 실제 캐스터처럼 경기 중계를 시작했다.

한껏 긴장한 터라 녹음테이프에 무슨 말이 담기는지 나조차 모를 일이었다. 이계진 선배는 돌아온 나를 회의실로 부르고 동료들도 모은 자리에서 녹음을 틀라고 지시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던 그 순간은 아직도 부끄럽지만, 이날은 위기의식을 가졌던 30대 여자 아나운서에게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후배님, 해봐! 해보자!”

1994년 4월 7일 광주경기장. 해태와 한화전의 세 이닝 중계로 나는 스포츠 캐스터로 데뷔했다. 중계석에 앉자마자 한화의 강석천 선수가 홈런을 치는 바람에 나의 중계 첫 멘트는 ‘홈러~~~언!’이었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인가. 국내 최초이자 세계 최초라는 여자 캐스터의 야구 중계방송은 다음 날 전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자기계발과 진로에 고민하던 그 시절, 새롭게 우뚝 선 날이었다.

나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그 이후 6년 동안 계속됐다. 일면식도 없던 대스타 김동엽 감독과 최동원 선수와 나란히 앉아 중계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 사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2011년 중계석 자리를 내놓고 방송국에서도 퇴사했다.

이듬해인 2012년 4월 ‘최초의 여자 스포츠 캐스터’라는 브랜드 효과 덕에 프로야구 시구를 요청받았다. 우습게도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선수에게 피칭 훈련을 받았다. 외국인 선수들이 “저 아줌마는 누구냐?”며 수군거리는데도, 낯선 그들과 한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야구는 이미 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해 힘썼던 30대에 만난 야구. 그 터닝 포인트 이후 40대, 50대도 여전히 나는 자신감을 갖고 산다.

야구는 내게 희망과 도전의 의미다. 그땐 투구 타이밍을 영 못 잡아 타자석까지 공이 가지도 못했다. 다시 불러준다면 타자가 맘 놓고 때릴 수 있도록 희망과 도전의 공을 힘차게, 정확하게 던지고 싶다.     


윤영미│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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