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의 기업문화 혁신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인사와 평가뿐 아니라 근무 및 회의 시간 관리, 호칭 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부장, 과장 등 기존의 직급 및 지위체계를 허물어 직무 역량 발전 정도에 따라 단순화된 단계로 재편한다거나 정기승진 대신 누적된 인사 마일리지를 기준으로 성과에 따라 상시적으로 승급을 진행하는 것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임직원 간의 호칭이 ‘님’, ‘프로’, ‘선후배님’으로 바뀌면서 실리콘밸리나 스타트업 기업에서 봄직한 변화가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퇴근 후 카카오톡 등을 통한 업무 지시를 금지하고, 의무적으로 휴가를 쓰게 한다거나, 필요한 이외의 회의나 야근은 최대한 줄이는 변화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성 고위 경영자가 야근과 회의가 잦은 관리직 직원들을 불러 구두경고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자녀 출산·육아 휴직에 남녀 직원의 참여가 함께 높아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지금과 같은 하드웨어 중심의 경직된 조직문화로는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기술 변화와 조직 환경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현재의 일하는 방식으로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갖춘 문제 해결형 인재를 키워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이용해 시공을 초월하여 업무를 처리해내는 디지털 경제 환경에서 일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 없이 변화에 부응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한편 수평적 문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2030 밀레니얼’들이 직장으로 대거 투입되고, 이들의 정서가 기존의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 운영 방식과 파열음을 내면서 변화를 요청하는 흐름이 내생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밀레니얼들은 정보통신에 익숙하고 협업에 능하지만, 집단적인 조직문화보다는 개인의 자율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세대이다. 본인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직장을 박차고 이직을 선택할 수 있는 담력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의 흐름에 기업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성균관대 산학협력단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2016년 ‘국민인권의식조사’에서 인권 보장을 위해 기업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비율은 14.4%에 그쳤고, 이는 경찰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 17.6%에도 못 미치는 비율로 충격적이다.
예전처럼 공급이 부족하고 경제규모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대에는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기업문화가 일정한 기능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수요가 부족하고 경제가 더디게 성장하는 저성장 시대에는 수평적인 문화, 협력하는 문화, 직원의 인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더욱 중요해진다. 과거에는 오너 중심의 기업가 정신이 각광을 받았다면 이제는 직원을 포함한 사람을 존중하고, 기업인과 직원이 서로 상생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다.
2016년 국민인권의식조사에서 응답자 및 가족의 인권을 침해한 주체로 직장상사와 동료가 1위와 3위로 각각 꼽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며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이렇게 답한 응답자들은 본인이나 가족이 지난 3년간 인권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사람들로 실제로 차별 경험의 중심에 직장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신명나게 일하는 곳이 되어야 할 직장이 오히려 개인 사고와 행동을 억누르는 공간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직원의 유연성과 창의성을 요구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주도적인 직장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퇴근 후나 휴일에 스마트 기기를 통한 업무 지시와 수행이 많아지면서 퇴근 후 카톡 등 SNS를 통한 업무 지시 관행을 차단하기 위한 카톡금지법안이 나온 것도 숨 막히는 직장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노동연구원의 2016년 조사에 따르면 국내 근로자 2402명 중 86.1%가 퇴근 후나 휴일에 스마트 기기를 통해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고, 이 중 27.5%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업무량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최근 2030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상화폐 열풍이 불면서 가상화폐로 돈을 번 젊은이들이 경쟁적으로 ‘퇴사인증’을 올려 대리만족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곱씹어보아야 한다. 닫힌 기업문화, 옥죄는 기업문화를 그대로 방증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직장은 평생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자기실현을 꾀하는 공간이 아니라, 살 방도가 생기면 언제든 떠나고 버릴 수 있는 실용적인 무엇으로 격하된 것이다.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이라는 신조어가 함축하는 것처럼 향후 데이터가 주도하는 기업문화가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데이터의 양과 저장 방법, 통신기술에 혁신이 가속화되고 상상할 수 없는 용량의 데이터가 생산·분석되면서 기업경영 패러다임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직된 리더십이나 의사결정구조가 데이터의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자연히 디지털 경영을 끌어안지 못하는 리더십에 대한 직원들의 불신이 커질 것이다.
데이터에 대한 열린 접근이 어려워지면서 기존의 리더십 관성이 데이터의 혁신적 잠재성을 억누를 개연성이 생긴다. 경영진의 조직적 저항도 예견해볼 수 있다. 밀레니얼 직원과 리더 간의 간극이 커질 수 있다. 직급체계의 변화와 보상체계의 혁신이 지속될 것이고, ‘워라밸’에 대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커지겠지만, 이 모든 기업문화의 변화가 리더십에 의해 뒷받침되고 또 주도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변화의 징후들은 ‘폭풍 속의 잔’에 그칠 공산이 크다. 권위주의적 문화가 발목을 잡으면서 직장 내의 세대 갈등이 재현되고 기업의 현실 적응 능력이 개선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채용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의 목소리는 커질 것이다. 최근 공공기관에서 실시되고 있는 블라인드 채용 관행이 기업 분야로도 확산될 것으로 예측해볼 수 있다. 기업은 혁명적인 기술 변화에 부응해야 함은 물론, 이에 못지않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도 적극적으로 부응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기술적·규범적 변화라는 양대 변화의 축에 부응하고 쇄신하지 않는 기업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참에 기업이 투명성과 공정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또 밀레니얼들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히 부응했는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공기업 채용비리로 우리 사회가 신음했지만, 사기업 채용비리는 아예 수면 위에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간 채용과 승진 과정에서 차별적 관행은 없었는지, 우리 사회의 인재를 골고루 채용하여 우리 사회의 잠재역량을 충분히 발굴하고 활용했는지 기업들이 뒤돌아볼 때다.
정부의 압박에 떠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변화할 필요는 없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최소한 기업은 공공부문보다 또 우리 사회의 평균적 요구보다 여러 발 앞서갈 필요가 있다. 가치를 창출하는 유일한 주체가 기업이듯, 기업은 우리 사회와 문화 전반을 변화시키고 진보를 주도할 수 있는 혁신적 역량을 갖고 있는 유일무이한 주체이다. 현재 진행되는 기업문화 혁신의 노력이 우리 사회 전반을 이끌어가고 또 모범적인 선례로 국민들 머릿속에 각인 될 때, 비로소 우리 기업은 진정한 변화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구정우│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