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7월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장강명 작가(왼쪽) ⓒ뉴시스
제법 모범적이라는 삶을 살았다. 아니, 살았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학생은 대학에 가게 된다. 대학에 가면 대기업을 목표로 하게 된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그 뒤로는 목표가 불분명해진다. 앞으로 20년 또는 30년을 이 비슷한 삶을 살게 되리라는 예감에 휩싸인다. 그 예감은 썩 달갑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바라는 삶의 방향은 아니었다.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나이도 아닌데, ‘거기서 더 늦어지면 핸들을 돌리기가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실망과 반대는 꽤 거셌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선택지에 없는 답이었다. 그동안의 내 선택은 늘 선택지 범주 안에 있었다. 이미 나 있는 길을 달리면 됐다. 내 생애 처음으로 선택지에 없는 선택을 했다. 경로를 이탈했고, 집을 나왔다. 고시원에 들어갔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시험을 준비했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군대에서다. 내 전공은 도시공학이었지만, 공학 수업을 들으면서 얻은 교훈은,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였다. 대학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언론사 준비 스터디 모임이라는 걸 했다. 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졌다. 몇 군데는 최종면접까지 봤지만 낙방했다. 졸업 시기였고, 취업해야 했다. 그즈음 대기업 건설사에 들어가게 됐다.
사표를 낸 건 다섯 달 정도 지나서였다. 신문사에 합격한 건 그로부터 몇 달 뒤다. 신문사에 다닐 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회사 안팎의 기자상도 제법 받았다. ‘청춘을 바쳤다’는 말이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일을 좋아했고, 동료들과도 끈끈했다. 그러나 10년이 조금 지난 후, ‘이 길을 계속하는 건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기자의 일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자기혐오와 회의감도 함께 자랐다. 노동의 강도가 높았는데 그에 못지않게 도덕적 긴장감도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데스크와 부딪쳤고,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껐다. 10년 근속 휴가를 신청했고, 휴가가 끝난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황당하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스스로 부끄러웠다. ‘나는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당시 나는 이미 등단한 작가였다. <표백>이라는 소설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휴가를 받아 방에 틀어박혀 쓴 글이었다. 당시에는 기자 일과 소설 쓰는 일을 병행하리라 생각했다. 등단 뒤로도 2년여 회사를 더 다닌 건 그런 이유였다. 나는 다시 경로를 이탈했다.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설을 썼다. 만 1년 동안 장편소설 다섯 편을 썼다.
이후 내 작품이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문학동네작가상 등을 받았다. 대부분의 작품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어 떠나는 젊은이들이 궁금해 쓴 책이다. <댓글부대> 역시 댓글조작 사건을 보면서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작품을 마치게 하는 힘은 ‘대결의지’다. 세계와의 대결의지. 시스템 안에 있지만 시스템과 거리를 두고 그 체계를 분석하겠다는 의지다. 그 의지를 처음 심어준 게 ‘대기업 퇴사’였다. 세계와 대결해본 첫 경험이었고, 이후 선택에 자신감을 주었다. 내가 모험해도, 세상은 별일 없이 돌아간다.
나 역시 별일 없이 산다.
장강명│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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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