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선선하다, 무르익다처럼 가을 자체를 표현하는 말부터 울긋불긋한 단풍, 높은 하늘처럼 가을의 특성을 뜻하는 말까지 다양하다. 가을을 뜻하는 모든 말을 포함할 수 있는 단어로 ‘평온함’이 있다. 그래선지 가을이 되면 바쁘게 종종거리던 마음에도 선선한 바람이 분다. 늘 바쁘게 오가던 길에 물든 빨간 단풍도 눈에 띄고 구름한 점 없이 파란 하늘도 눈에 들어온다. 하늘 높이 솟았던 해가 지평선에 걸리면 붉게 물든 노을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그 평온함 때문일까. 가을만 되면 유독 길을 떠나고 싶은 욕구가 춤춘다.
가을은 사실 굳이 어딜 가지 않아도 예쁜 계절이지만 이맘때면 꼭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 전라남도 순천이다. 순천의 가을은 황금빛이다. 널찍한 평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논이 그렇고 순천만을 뒤덮은 갈대가 그렇다. 올해는 단풍이 예년보다 좀 늦어질 모양이지만 순천만을 지키는 갈대만으로도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순천역까지 약 두 시간이 걸린다. 순천의 황금빛 가을을 만나러 가는 길, 기찻길을 따라 누런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에 괜스레 마음이 평온해진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황금빛을 보는 것만으로 부자가 된 기분이다.
▶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순천만습지로 향하는 길에서 트렌치코트를 맞춰 입은 연인이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있다. ⓒC영상미디어
가을을 맞은 순천에서 가장 ‘핫플’인 장소는 순천만국가정원이다. 순천역에서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순천만국가정원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돌아볼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웬걸. 국가정원 자체가 워낙 넓어서 그런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그 많은 방문객을 빨아들인다. 순천만국가정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인공 정원이다. 면적만 111만 2000㎡로 축구장 155개가 밀집한 것과 규모가 비슷하다. 나무 83만 7000그루, 꽃 413만 송이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국가정원은 2013년 4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면서 알려졌다. 순천만정원은 순천만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순천만습지가 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고 습지 인근에 나무와 꽃을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 2015년 9월 국내 최초로 국가정원이 되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가가 정원을 자연유산으로 인정한 첫 사례였다. 습지를 보존하려 만든 순천만국가정원은 이제 순천만습지만큼이나 유명해서 해마다 6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순천만정원 입구를 지나니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은 초록의 잔디밭이 시야를 메운다. 순천만정원은 잘 정돈된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은 아니다. 군데군데 다 나름의 테마가 있다. 미국, 영국, 일본, 네덜란드 등 국가별 정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워낙 넓다 보니 제대로 구경하려면 족히 서너 시간은 잡아야 한다. 그만큼 걸을 자신이 없다면 정원 곳곳을 누비며 다니는 전기차가 있으니 안심하시길. 하지만 순천만에 깃든 가을을 찬찬히 살펴보려면 걷는 것을 추천한다. 오랜 시간 걸을 자신이 없다면 지구동문에서부터 미로처럼 빙글빙글 돌아 정상까지 올라가는 봉화언덕을 지나 억새길로 가는 코스를 추천한다.
▶ 1 순천만정원에서 가장 높은 봉화언덕이 멀리 보인다.
2 가을을 대표하는 꽃 코스모스 사이를 산책하고 있는 관광객들
3 스카이큐브 문학관역에서 내려 순천만습지로 가는 길에 있는 순천문학관 ⓒC영상미디어
황금빛으로 물든 전남 순천
멕시코 정원, 태국정원 등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의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어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억새길에서 가을의 흔적을 조금 맛보고 나면 금세 코스모스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코스모스 옆에는 가을 여행 명소에 가면 으레 보이는 ‘핑크뮬리’가 자리하고 있다. 여름에는 하늘하늘한 초록색 이파리 모양이다가 가을이 되면 핑크빛에서 자줏빛으로 물드는 핑크뮬리는 가을 여행 인증샷을 찍을 때 필수 아이템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핑크뮬리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핑크뮬리 밭에는 이 식물의 빛깔만큼이나 핑크핑크한 기운을 뿜어내는 커플이 한가득이다. 가을에 흔히 볼 수 있는 핑크빛에 매료돼서인지 순천만정원의 다른 어느 곳보다 핑크뮬리 앞에는 유독 커플이 많다. 다들 삼각대나 셀카봉을 손에 들고 있다. 커플룩을 맞춰 입고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는 사람도 꽤 된다. 코스모스와 핑크뮬리로 기억 한편에 자리할 가을을 남겼다면 본격적으로 가을을 만나러 가보자.
순천만정원 서쪽에 있는 동천을 따라 걷다 보면 알록달록한 타일에 한글이 한 자 한 자 적힌 ‘꿈의 다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꿈의 다리 내벽에는 16개국에 사는 14만여 명의 어린이가 자신의 꿈을 담은 그림을 그린 것을 정사각형 틀 안에 넣어 전시하고 있다. 외관은 강익중 작가가 일상에서 느꼈던 유쾌한 시구를 모자이크 타일 모양으로 담아냈다.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문구도 있는 반면 ‘코가 닮은 사람끼리 친하다’처럼 이런 말도 있었나 싶은 내용도 있다.
정갈한 정사각형 안에 들어 있는 한글을 따라 읽다 보면 스카이큐브를 탈 수 있는 ‘스카이큐브정원역’에 도착한다. 스카이큐브는 순천만국가정원의 정원역과 순천만습지 근처에 있는 문학관역 5.2km를 오가는 모노레일이다. 시속 40km로 움직이는 스카이큐브에 오르면 발아래로 가을을 맞이한 순천만습지 일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는 수확을 앞둔 여문 벼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누런 들판이, 오른쪽에는 가을의 넉넉함을 닮은 동천이 유유히 흐른다. 수상자전거를 타고 동천을 누비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정원역에서 출발한 지 약 10분쯤 지나면 문학관역에 도착한다.
문학관역에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순천만습지가 펼쳐진다. 습지로 가는 길은 동천을 따라 나 있는 갈대가 하늘거리며 여행객을 인도한다. 바람을 따라 춤추는 갈대를 바라보며 걷다 보면 순천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학관역에서 순천문학관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순천문학관은 순천 출신 작가 김승옥과 정채봉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곳이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으로, 정채봉은 <초승달과 밤배>로 잘 알려졌다. 김승옥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도시 무진은 순천을 따서 만든 가상도시라는 것을 <무진기행>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김 작가는 199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말과 글을 잃은 후 2017년 <그림으로 떠나는 무진 기행>으로 독자에게 돌아왔다. 책으로 봤던 순천의 강과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익숙한 우리 강산의 모습인데도 반갑고 신기하다. 순천만습지로 향하는 길, 책에 나온 ‘무진교’처럼 작은 다리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함께 걷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 다리를 지나면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 하나인 순천만이 모습을 드러낸다.
▶ 4 우리나라 최대 갈대군락지인 순천만습지가 황금빛 들판과 어우러져 있다. ⓒC영상미디어
순천만은 생태계의 보고(寶庫)로도 유명하다. 겨울이면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철새 희귀종이 순천을 찾는다. 매년 1000마리가 넘는 철새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군무도 순천만의 볼거리 중 하나다. 이런 특성 때문에 2003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후 2005년 람사르협약에 등록됐고 2008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이름을 올렸다. 새도 사람도 사랑하는 순천만은 갯벌 22.4㎢, 갈대 군락이 5.6㎢에 220여 종의 조류와 120종의 식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다. 순천만습지에 있는 갈대밭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거나 성기게 있는 갈대밭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인 남자 키를 훨씬 넘는 갈대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습지를 메우고 있다. 갈대 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할 만하다. 멀리서 보면 갈대밭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물억새, 쑥부쟁이도 군데군데 모습을 나타낸다.
순천만습지가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 질 무렵이다. 갈대의 복슬복슬한 씨앗 뭉치가 노을의 은은한 금빛으로 물든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하다. 아직 철새가 날아들 때가 아닌데 대열을 맞춘 기러기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다. 시옷 자 대열을 맞춘 기러기 떼 뒤로 대열에서 이탈한 기러기 한 마리가 힘차게 무리를 쫓는다.
순천만의 하늘을 철새가 주름잡고 있다면 땅, 습지에는 갈대만큼 무수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갯벌에서 사는 게가 낸 숨구멍이다. 짱뚱어, 칠게, 농어 같은 갯벌 생물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낸다. 손에 갈대를 꺾어 들고 있는 아이가 갈대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게를 잡으려고 열을 올린다.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훑는 바람이 시원하다. 순천만을 물들이며 모두의 마음을 훔친 노을이 바람을 따라 흩어진다. 황금빛을 닮은 순천의 가을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순천에 떠오른 문화의 ‘달’
문화체육관광부는 10월 20일 ‘문화의 날’을 맞아 10월 문화의 달 주빈 도시로 순천시를 선정했다. ‘문화의 달’과 ‘문화의 날’은 문화예술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문화의 달은 매해 10월, 문화의 날은 10월 셋째 주 토요일이다. 문체부는 2003년부터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문화의 달마다 ‘주빈도시’를 선정해 지역문화 발전을 장려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순천만국가정원 등 순천시 일대에는 문화의 달을 기념할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된다. 10월 19일 국가정원에는 ‘한반도 평화문화 토크콘서트’, ‘청년문화공간 청년문화놀장-차오름’ 등이 열린다. 순천역과 순천대 입구 등지에서 문화의 달을 기념하는 플래시몹도 열릴 계획이다.
문화의 날에는 ‘순천만 판타지’ 공연, 문화적 지역 재생을 모색하는 학술대회 등이 개최된다. 또한 ‘정원으로 나온 도서관’, ‘정원 산책’, 순천만습지를 무대로 한 ‘인문 기행’, 지역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시화 깃발을 만드는 ‘순천만 깃발 시화전’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이벤트가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