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는 자연이 먼저 눈치 챈다. 강렬한 햇볕 때문에 올려다볼 수 없던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얼굴을 보여주고 녹음이 짙었던 숲은 울긋불긋한 가을 옷을 갈아입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가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언제 왔냐는 듯 다시 사라지고 말 계절이다. 끝이 정해져 있어 아쉬운 만남이지만 아쉬움만 남긴 채 보낼 수는 없다. 가을의 절정에서 가장 찬란한 기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단풍여행이다.
단풍여행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다. 가을은 공평하게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창밖만 내다봐도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수도권에서 쉽게 갈 수 있는 단풍 명소로 간이역을 추천한다. 어딜 가도 사람으로 북적이는 수도권에 있는 간이역은 복잡한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화랑대역’이 그렇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빌딩과 아파트촌 사이에 자리한 화랑대역은 한때 서울에서 청춘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역 중 하나였다. 성동역에서 춘천역까지 연결된 옛 경춘선 노선을 따라 가평, 강촌 같은 여행지로 떠나는 길목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2010년 경춘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폐역이 됐지만 인근 철길은 ‘숲길 철도공원’으로 새 단장했다.
시간이 멈춘 역사와 철로, 승차장, 이정표, 에메랄드빛 지붕에서 간이역의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오가는 기차가 없어서 쓸쓸할 만도 한데 여전히 이곳을 지키는 아름드리나무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아름답기만 하다. 불그스레하게 물든 이파리에서 가을이 확 느껴진다. 수많은 청춘의 추억을 담았을 화랑대역 인근 철도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수가 반긴다. 이파리에 내려앉은 붉고 노란 색깔이 깊어가는 가을을 실감케 한다. 얇은 철길을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보던 철길 데이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철도공원을 방문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협궤열차 혀기1호와 체코에서 운행했던 트램, 일본의 노면 전차, 은하철도 999에 나올 법한 증기기관차 미카 5-56호 등 ‘기차 덕후’라면 놓쳐선 안 될 실물 크기 기차가 철도공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적북적한 도심 속에서 여유로운 가을 향취에 빠져보고 싶다면 간이역을 찾아가보자.
서울 도심부터 강원도까지 공평하게 온 가을
가을 단풍 하면 강원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전 국민이 자주 찾는 여행 명소라 식상하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중 좀 특별한 단풍을 볼 수 있는 여행지는 강원도 홍천에 있다. 홍천 ‘은행나무숲’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가을 여행지다. 은행잎의 노란 물결이 절정을 이루는 10월이면 딱 한 달만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아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그루씩 심기 시작한 은행나무가 세월을 더하자 숲을 이뤘다. 홍천 은행나무숲에는 다른 색을 찾아볼 수 없다. 온 세상이 눈부신 노란빛으로 가득하다. 은행잎이 떨어진 바닥에도 나뭇잎이 걸린 하늘도 온통 노랗다. 은행나무숲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면 아침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인적이 드문 시간대라 조용히 걷기 좋다.
▶ 강원 홍천군 내면 광원리 은행나무숲을 찾은 관광객들 ⓒ연합
강원도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단풍 명소도 있다. 인제군에 있는 연가리골이다. 연가리골은 ‘삼둔사가리’로 알려진 곳이다. 삼둔사가리는 강원도 인제와 홍천에 물, 불, 전쟁 둥 세 개의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둔’은 깊은 산속에서 재난을 피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가리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계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월둔, 살둔, 달둔 등 3둔과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의 4가리가 여기 있다. 연가리는 삼둔사가리에서도 가장 오지에 있는 마을이다. 6·25전쟁이 났을 때 전쟁을 피해간 마을이라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현실 버전이다. 마을 곳곳에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집터가 아직 남아 있다.
▶ 1 강원 인제군 연가리골 초입에 위치한 계곡 ⓒ조선DB 2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옛 화랑대역 ⓒ서울시
연가리는 다른 가리에 비해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있다. 그래서 오지에 있는 마을이라도 한결 걷기 편한 길이다. 다만 입구가 워낙 좁아 눈을 크게 뜨고 길을 놓치지 않게 잘 살피며 걸어야 한다. 인제 기린면과 양양 서면을 연결하는 조침령로를 따라가면 적암마을에서 연가리로 들어가는 계곡이 보인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한 사람씩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 나온다. 연가리골의 시작이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원시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폭포에 있는 바위에는 이끼가 빼곡하게 붙어 있고 폭포 옆 낙엽송이 아름다운 단풍나무숲을 만들어놨다. 잘 닦은 등산로가 아니라 수풀을 헤치고 걷는 게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나는 소쩍새, 지빠귀 소리와 계곡에서 헤엄치는 열목어와 어름치와 함께 산속에 있노라면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그저 즐거운 콧노래를 흥얼거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