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사는 물고기는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 물을 마음껏 마시지 못한다.│한겨레
사막에 고립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의 눈앞에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두 개가 나타났습니다. 왼쪽 방향 이정표에는 ‘물 10km’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 방향 이정표에는 ‘H₂O 1km’라고 적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왼쪽으로 향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설마 ‘H₂O가 물을 뜻하는 분자식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많습니다. 제가 실제로 이탈리아의 산골 호텔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물을 주문하고 싶었으나 물을 이탈리아 말로 뭐라고 하는지 몰랐습니다.(사실 이탈리아어는 한마디도 못합니다) 영어와 독일어로 물을 달라고 했지만 못 알아듣더군요. 그래서 메모지에 H₂O라고 적어 보여주었는데도 웨이터는 끝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한참 후에 어떤 이탈리아 사람이 들어와서 아쿠아(aqua)를 주문할 때까지 물을 주문하지 못하고 커피만 마셔야 했습니다.(이탈리아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아주 진한 에스프레소를 줍니다. 갈증 해소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 10km’-‘H₂O 1km’, 어디로 갈까?
사람들은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물은 주지 않고 ‘일산화이수소(一酸化二水素)’나 ‘산화이수소(酸化二水素)’ 또는 다이하이드로젠 모노옥사이드(Dihydrogen Monoxide, DHMO)를 마시라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 사람에게 왜 이렇게 무서운 물질을 먹이냐는 것이죠. 그런데요,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이름은 모두 H₂O를 화학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아마 이정표에서 ‘H₂O’를 이해한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이정표를 적어놓으면 1km만 가면 되는 우물 대신 10km 떨어진 우물을 찾아가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어떤 화학자들도 물을 이렇게 이상한 화학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물, water(영어), Wasser(독일어), aqua(이탈리아어), agua(스페인어), eau(프랑스어), みず(일본어)라고 읽습니다. 물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물질이어서 화학자들도 그냥 보통 사람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사람 이야기가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사실 사막에 갈 때마다 경험했습니다.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습니다. 모래에 푹푹 발이 빠지는 사막에서 길을 잃으니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다니다 보니 더 지치고 갈증이 나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죠. 공룡 화석을 찾으러 간 고비 사막에서는 차에 물병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뜨거운 사막에서 몇 시간 동안 갈증을 참아야 했습니다.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는 동틀 녘 추위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목은 마르더군요. 서호주의 사막은 풍경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갈증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막을 여행하는 게 아니라 물속을 여행하는 거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고래나 바닷고기 그리고 민물고기를 부러워했죠. ‘이 친구들은 아무리 먼 거리를 여행하더라도 물 걱정은 없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물고기라고 해서 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는 물을 실컷 마시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많이 마시면 죽습니다. 민물고기는 몸 안의 염분 농도가 몸 바깥보다 높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될까요? 굳이 물을 먹지 않더라도 민물이 피부를 통해서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김장할 때 배추를 절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배추를 소금물에 담가놓으면 배추 안에 있던 물이 바깥으로 빠져나오죠. 배추 바깥쪽의 염분 농도가 높아서 어떻게든 맞춰보려고 물이 바깥으로 빠져나가 배추가 쭈글쭈글해지는 것입니다. 뻣뻣한 배추보다는 물이 빠져나가서 부드러운 배추가 먹기 좋죠. 또 소금은 해로운 미생물과 세균의 번식을 막아서 배추가 썩지 않도록 해줍니다. 김장 김치를 비닐로 잘 싸두는 이유는 산소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산균은 살아남고 나쁜 균만 죽거든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교외로 한 시간 반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사막│한겨레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가장 부족하다
그런데 민물고기가 입으로 물을 자꾸 마시면 어떻게 될까요? 몸 안의 염분 농도가 지나치게 낮아져서 살 수 없습니다. 세포막이 파괴되고 신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든요. 민물고기는 물에서 살지만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염분이 높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어떨까요? 바닷물고기는 물을 마시기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민물고기와는 반대로 염분 농도가 너무 높아져서 죽습니다. 물고기들이 입으로 마시는 물은 아가미로 빠져나갑니다. 물을 마실 때도 숨을 쉴 때도 먹이를 먹을 때도 들어온 물은 모두 아가미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드디어 물을 찾은 다음에 마시는 물은 정말 꿀맛입니다.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모릅니다. 물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지요. 이것은 물 바깥에서 사는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민물고기든 바닷물고기든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지만 물을 시원하게 마시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마음껏 마시면 익사합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뭐든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게 가장 부족한 법인 것 같습니다. 파주와 잠실에 살 때의 일입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장마 때만 되면 동네가 물에 잠겼지요. 동네가 물에 잠기면 가장 부족한 게 물이었습니다. 사방이 물인데 마실 물이 없습니다. 물을 보면서도 먹지 못합니다. 갈증이 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마다 유난히 강조하는 덕목이 있습니다. 사랑, 화합, 단결, 충성, 근면, 저축 같은 것들입니다. 간단합니다. 저축을 강조하는 가정은 돈이 없는 가정입니다. 화합과 단결을 외치는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를 외치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장 부족한 것을 강조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입니다. 외면하지 말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해야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물에 살면서 물 하나 실컷 마시지 못하는 물고기보다는 형편이 좋습니다.
이정모_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 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 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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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