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5월 평양자수연구소를 방문해 북측 수예가들의 작업을 지켜보는 모습 ⓒ장경희
“내년에 살구 따러 다시 올래요.”
2005년 5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내 옆에 앉은 안내원, 한 선생에게 한 말이다. 순안공항에서 승합차를 타고 평양 시내로 들어가던 중 천리마 동상 아래 나무가 우거진 모습이 특히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내년에도 평양을 꼭 오고 싶다는 바람으로 말한 것이다.
나는 말한 대로 된다고 믿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듬해 3월 다시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 겨울이라 살구는 따지 못하고, 안내원도 바뀌어 섭섭했다. 어쨌든 박물관 관람 일정이 있기에 오전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오후에는 조선미술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러 옥류관으로 갔다. 이번에 2018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다들 맛있게 먹었던 평양냉면을 먹으러. 그런데 웬일인가? 저만치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한 선생이었다. 이번에는 못 보나 했는데, 1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평양 시내에서 남쪽 여자가 북쪽 안내원을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반가워 두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눈물만 흘린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잘 있다는 안부는 들었으나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평양의 한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참 동안 먹먹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바로 한 선생과의 추억이 담긴 평양자수연구소의 사진이다. 당시 남북의 인간문화재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하는 2005년 ‘제1회 남북전통공예교류전’을 기획하던 중이었다. 내 의도를 이해한 그의 따뜻한 배려로 자수연구소를 방문해 구석구석 살펴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된 기회였다. 공훈예술가인 로정복 소장을 만났고, 20평 남짓 큰 수예실 두 방에는 수십 명의 수예가들이 울긋불긋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채 수를 놓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들은 혼자나 둘이서 예술작품을, 나이 어린 학생들은 둘씩, 넷씩 마주 앉아 수출용 ‘가화만사성’ 글자나 소품을 수놓았다. 그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자수를 놓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왜 북한에 가서 장인들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미술대학에서 공예과가 점점 줄어들고,
장인에 의해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전통공예도 나날이 취약해지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문화재청에 취직해 무형문화재의 기록화 관련 업무를 3년간 담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2002년 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8호 바디장 구진갑 보유자의 기록영화를 찍고 책을 썼다. 하지만 2006년 그분이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후계자가 없어 맥이 끊어진 상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2006년 제2회 ‘남북전통공예교류전’을 추진하게 됐다. 그리고 몇 차례의 방북 경험을 토대로 <북한의 공예>, <북한의 박물관>, <고려왕릉> 등의 책을 냈고, 그중 <북한의 박물관>은 일본학자와 5년간 노력 끝에 2018년 번역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우리 인간문화재, 그중 전통공예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 싶어 북한의 실상을 알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평양자수연구소, 만수대창작사, 평양미술대학, 조선민속박물관 등에서 수많은 수예, 도예, 나전칠기에 종사하는 젊은 공예가와 교류한 것이다.
그로부터 11년간, 한 선생도 없고 인간문화재의 남북 교류도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 남북 정상의 만남은 인간문화재의 남북 교류에도 희소식이 되길 바란다. 우리 전통공예를 되살릴 방법을 인간문화재의 남북 교류를 통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다시 평양에 가서 살구를 따고 싶다.’
장경희│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