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한식의 대모 심영순과 중식의 대가 여경옥!
맛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문가 3인이 추석 음식에 대해 입을 뗐다.
추석 음식에 대한 저마다의 추억, 생각, 추천 음식을 담았다.
ⓒ연합
음식은 명절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여기에 농산물 수확과 맞물리는 추석은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지는 명절이다. 하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차례와 제사 음식 장만으로 ‘명절 증후군’이라는 사회현상이 불거졌다. 명절 증후군은 명절을 보내면서 생기는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적·육체적인 현상을 말한다. 실제 병은 아니지만 심한 부담감과 피로감이라는 증상이 있다. 여성의 경우 명절 음식 장만 및 뒤처리 등 가사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허례허식이 불러온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모두 즐거워야 할 추석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전문가 3인은 입을 모아 말한다. “형식에 얽매이지 말라”고.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차례를 없애자”고 주장하고, 어설픈 상차림에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 한식의 대모 심영순 씨도 “음식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유교의 본국에서 온 중식 대가 여경옥 셰프도 “일방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은 재고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전문가 3인의 추석 진단부터 특별한 추석 음식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한데 버무려 담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덜 익은 벼 거두어 만든 ‘오려송편’ 최고
ⓒC영상미디어
황교익 씨는 제사 문화를 없애기 위해서 전 국민적인 ‘상놈 선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사는 원래 소수 양반의 의무였는데, 조선 말기 군역을 피하기 위해 돈으로 양반을 사는 평민이 늘어나면서 조율이시, 홍동백서 등 민간 관습이 생겼다는 말이다.
“사실 국민의 90% 이상이 상놈(상민, 백성)이에요. 상놈 선언을 하면 편안해져요. 강연을 할 때 이런 폐단 이야기를 하고 ‘다 같이 상놈 선언을 합시다’ 하면서 저부터 손을 번쩍 드는데, 호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누구나 양반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는 거예요. 그 마음을 없애기 전에는 이런 허례허식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한번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정부 물가 자료대로 차례상을 차려보았다. 차려놓고 보니 모두 계절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곶감과 밤·대추도 묵은 것이고, 겨울 채소인 시금치와 배추도 추석쯤에는 맹탕이었다. 조기 역시 살이 무르고 맛이 엉성할 때였다. 결국 차례상에는 맛없는 것들만 올려놓고 먹는 셈이어서 한숨이 나왔다. 문제는 예서의 기본으로 자리 잡은<주자가례(朱子家禮)>나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디에도 차례 상차림을 규범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올리는 음식에 대한 규정이 없어요. 그러니까 맛있는 제철음식이면 괜찮다는 거예요. 따를 것은 가가례(家家禮)뿐인데 이게 집집마다 저마다의 예를 따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남의 집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것 없다는 거죠. 내 조상 모시는 데 남의 집 눈치 볼 필요 있나요? 돌아가신 분이 고기를 좋아하셨다면 스테이크 올려도 돼요. 커피를 즐기셨던 분이면 샷 추가한 진한 아메리카노? 뭐 어때요? 후손이 나를 생각해주는 그 자체가 진정한 전통 아닐까요?”
추석 즈음에는 곡식이나 과일이 대부분 익지 않은 상태다. 추수를 하기 전, 농사의 중요 고비를 넘겼을 때 미리 곡식을 걷어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 추석의 본 의미이다. 힘든 여름 농사일은 끝냈고, 가을 추수라는 큰일을 앞두고 성묘도 하고 조상께 감사하는 시기였다. 황교익 씨는 추석 음식으로 ‘오려송편’을 꼽았다. 덜 익은 벼를 거두어 만든 쌀이 오려쌀이고, 그 오려쌀로 빚은 송편이 오려송편이다.
“떡 빚을 쌀은 아직 거두지 못했는데 환한 보름달이 떴잖아요. 대보름에는 탑돌이를 하든, 달맞이를 하든 놀아야죠. 떡 빚을 쌀은 아직 거두지 못했는데 떡은 빚어야 하고, 그래서 나온 것이 오려쌀로 빚은 오려송편이에요.”
떡은 밥과 달리 담장을 넘는 특유의 속성이 있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는 떡을 하고, 그 떡을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이 한국인의 오랜 풍습이다. 그런 속성으로 보면 밥은 가족의 음식이라 할 수 있고, 떡은 공동체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가족 중심인 밥의 시대가 열렸어도 대규모 노동이 필요한 농경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질서 유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절마다 여러 행사를 이유로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는 일을 벌였다. 그 행사의 주요 매개로 떡이 사용됐다. ‘떡타령’의 가사에도 보면 정월대보름 달떡, 이월 한식 송병(松餠), 삼월 삼진 쑥떡 등 다양한 떡을 이웃과 함께 빚고 나누었다. 올 추석에도 조상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다들 송편을 먹고 이웃과 나눌 것이다. 황교익 씨는 오려송편이 없더라도 담을 넘는 떡처럼 모두에게 따뜻한 추석이 되기를 기원했다.
한식의 대모 심영순
위를 보호하고 염증 치유에 좋은 ‘토란탕국’ 추천
ⓒC영상미디어
머리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올림머리는 한식의 대모 심영순 씨의 대표 이미지이다. 추석 상차림에 대해서도 한없이 깐깐할 것 같지만, 대가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식에 얽매여 상차림의 도만 지키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형제지간에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시간을 더욱 즐겁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음식이라는 것이다.
“저도 친척들과 송편을 빚고 전도 부치면서 그간의 근황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죠. 명절이 돼야 사촌지간이나 조카 손자들 소식까지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되니까요. 섭섭한 일로 언성을 높이는 일도 더러 있지만, 서운함을 나눈 것으로 앙금이 해소되니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되지요. 그게 가족 아닐까요?”
심영순 씨는 음식을 준비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아쉬움도 털어놓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일련의 과정들이 명절 증후군으로 회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차례상은 조상을 섬기는 우리나라의 전통 상이지만 주객이 전도되지 않고, 형제지간에 우애를 다지기 위한 자리로 그 뜻을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심영순 씨는 추석 음식으로 위를 보호하고 염증에 좋을 뿐 아니라 차례상 탕국으로도 부족함 없는 토란국을 ‘일석삼조’라고 추켜세웠다.
“개인적으로는 토란탕국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철 나오는 토란은 일 년 중 제철에 꼭 먹어야 하는 식재료인데, 탕국으로 먹을 때 가장 맛있거든요. 진한 소고기 육수를 내어서 가족들이 다 모이는 추석날 먹기에 제격이지요.”
올해는 토란국에 생선찜, 잡채, 냉채, 전유어, 나물, 갈비찜 등을 준비할 생각이다. 여기에 물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기름진 음식에 시원한 물김치만큼 잘 어울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영순 여사는 무설기떡도 기억했다. 우유를 쌀가루에 내린 뒤 무채를 설탕, 소금과 버무려 찌는 떡이다. 무가 맛있는 시기에 가정에서 많이 해먹던 음식이다. 하지만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인지 요즘에는 추석에 보기 힘들어졌다며 아쉬워했다.
오남매 중에 맏며느리로 명절이면 열흘 전부터 대청소를 시작한다는 심영순 씨.
“한꺼번에 만들려면 재료 손질부터 바빠서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지요. 그럴 때는 미리 준비하는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체크해나가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심영순 씨는 지금도 조리 기구와 그릇들을 점검하고 인원을 체크한 다음 추석 메뉴를 구상한다. 며칠 전부터 천천히 준비하다 보면 하루 전날은 가열하는 일만 남는다는 고수의 팁을 전했다.
중식의 대가 여경옥
둥근 달 모양을 닮아 원만함과 행복 상징하는 ‘월병’
ⓒC영상미디어
중식계의 손꼽히는 스타인 여경옥 셰프는 한국과 중국의 추석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화교 출신인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2006년에 귀화했다. 여 셰프의 친가는 모두 중국에 있지만, 외가 식구들은 한국에 많다. 그래서 추석이면 2~3시간 정도 차를 타고 친척들이 사는 곳으로 이동했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는 친척들 만나는 게 마냥 좋았죠. 그런데 지금 떠올리면 누군가에게는 힘든 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교들은 제사를 안 지내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면 먹고 치우는 것도 일이잖아요.”
여경옥 셰프의 집안에서도 추석인 중추절에 식구들이 모인다.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아버지 산소 갈 때는 간단하게 과일이나 술을 챙긴다. 형인 여경래 셰프와 만두를 빚어갈 때도 있다. 중국에서는 중추절에 음식을 따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래전에 넘어온 화교들은 제사상을 차리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엄격한 규율 없이 생선이나 닭, 제철 과일 등으로 간단하게 차린다.
“한국보다 중국의 제사가 더 유연한 거 같아요. 전통도 좋지만 옛날 방식을 고수하려고 해도 예전 먹거리랑 지금 먹거리가 많이 다르잖아요. 옛날에 없던 것도 있고, 좋은 건 지금이 더 많고요.”
여경옥 셰프는 시대가 달라진 만큼 일에 대한 분담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은 원래 남자들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해요. 손님 접대 음식도 남자들이 차리고요. 농경사회에서는 남자들이 농사를 짓고 닭과 돼지를 잡았는데, 지금은 그 역할을 마트가 대신하잖아요. 그 상황에서 여자들만 일을 하는 건 불합리한 거 아닐까요?”
한국 사람들이 추석에 송편을 먹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중추절에 월병을 먹는다. 둥근 달 모양을 닮은 월병은 원만함과 행복 등을 상징하는데, 월병을 먹으며 달을 향해 소원을 비는 것이 중추절의 가장 큰 행사이다. 과거 혁명을 일으킬 때 월병 안에 밀서를 넣어 전달하는 일도 있었다.
“월병이 둥근 달을 닮았잖아요. 중국에서는 둥근 것들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달처럼 원만하자는 의미로 월병을 먹죠. 월병에는 그해 수확한 곡식이나 잣, 깨 등 견과류를 넣어요. 과일 잼이나 팥 등을 넣기도 하죠. 중국에서는 월병 소로 고기를 넣기도 해요. 월병은 워낙 다양하게 변화됐는데, 그것들도 전부 다 전통이 됐죠.”
월병은 깨나 콩 등 한두 가지 재료만 들어가는 송편과 달리 들어가는 재료가 다양하고 양도 많다. 중국에서는 월병 전문점에서 사다 먹는 것이 일상이다. 중국에서도 차례를 지내기도 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월병을 먹으며 달에게 소원을 비는 풍습만 남았다.
“60세가 넘은 화교 분들 중에는 차례를 지내는 분도 계세요. 그런데 그 문화가 아래 세대로 전해지지는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면 한국도 비슷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아쉽겠지만, 모두 행복해지고 즐거운 것을 전통으로 한다면 아쉬운 마음이 덜하지 않을까요?”
강보라 |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