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작은 마을이다. 새하얀 유니폼에 새하얀 조리사 두건을 쓴 새침한 아가씨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두부를 건져 올린다. 옆에서 지켜보고 섰던 할머니는 한 모 달라며 먹고 가겠다고 한다. 아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작은 접시에 받쳐 두부를 건넨다. 할머니는 가게 앞 벤치 가장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느긋하게 두부를 먹는다. 오물오물 오물오물. 입술만 움직이지 않았다면 정지 화면으로 보였을 것이다. 할머니 옆자리로 햇볕이 머물다 간다.
장면이 바뀌면, 위스키만 파는 작은 주점이다. 바텐더와 손님이 마주 보고 앉은 카운터 식탁이 전부일 만큼 협소하다. 메뉴는 위스키에 물을 부어 연하게 만든 ‘미즈와리’뿐. 글라스에 아기 주먹만 한 얼음을 넣은 뒤 위스키를 잔의 절반쯤 채우고 손잡이가 긴 스푼으로 몇 초간 빠르게 휘젓는다. 다시 나머지 절반을 물로 채운 뒤 긴 스푼으로 몇 초간 다시 빠르게 휘저으면 완성이다. 글라스와 얼음과 위스키와 스푼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여울물 소리가 고막을 기분 좋게 진동시킨다.
감독은 관객들이 미즈와리 조리법 하나는 마스터하고 영화관을 나서기를 바랐던 것일까. 영화 내내 손님이 미즈와리를 주문할 때마다 관객은 미즈와리 제조 과정을 리얼타임으로 관람한다.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르고, 휘젓고, 물을 채우고, 다시 휘젓고… 하나도 편집하지 않는다.
“아니, 이게 대체 뭐하자는 영화야?”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낸들 아나. IPTV에 올라온 영화 중에 포스터가 괜찮아 보이는 걸 틀었을 뿐이다. 이게 일명 일본 ‘슬로무비’ 계열 영화인가 보다.
“말하자면 ‘백색소음’의 영화판 같은 건가 봐. 스토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장면들이 묘하게 마음을 풀어주는 거 같지 않아? 이야기를 보지 말고 색감이나 소리 같은 거에 집중해봐. 강아지가 잠자는 모습이나 아기 고양이가 엄마 젖 빠는 거만 온종일 보여주는 채널 같다고 생각하면 돼.”
백색소음이란 모닥불 타는 소리나 빗소리, 바람 소리, 멀리 기차 지나는 소리처럼 음폭이 넓어서 생활에 방해를 주지 않고 되레 심리적 긴장감을 풀어주는 소음을 말한다. 진공 상태에 가까운 무음보다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해서 최근 몇 년 사이 수험생들을 중심으로 화제가 됐고 백색소음 전문 인터넷 사이트 등장에 이어 가정용 백색소음기라는 것까지 출시됐다.
감독이 듣는다면, 자기 영화를 ‘연필 깎는 소리’쯤에 빗대서 서운하려나. 어쨌든 ‘마더 워터’(2010)라는 이 영화는 105분의 러닝타임 안에 백색소음의 필요충분조건을 잘 녹여놓았다.
첫째, 명대사가 없다. 인상적인 것이 나오면 의미를 곱씹느라 마음이 쉬지 못한다. 이따금 등장인물이 멋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말하지만 전부 공허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모두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둘째, 졸면서 봐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예컨대 두부집 아가씨가 어제는 커피집에 가더니 오늘은 위스키집에 가서 되나마나한 소리를 중얼거리는데, 잠깐 졸다가 봤다고 해서 스토리 이해에 문제될 게 있나? 하나도 없다. 오히려 커피콩 가는 것까지 보다가 졸았는데, 아직도 핸드드립이 안 끝났다고 혀를 차게 될 것이다.
셋째, 이미지와 사운드를 절제해서 사용한다. 색감은 아침 일곱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 보이는 맑고 선명한 쪽이 주를 이루고, 소리도 간소한 음악에 생활 소음이 황금비율로 간을 맞춘다. 의미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침묵과 침묵 사이를 구름처럼 머물다 흘러간다. “두부 한 모 주세요. 먹고 가실 건가요? 먹고 갈게요. 간장입니다. 고맙습니다…” 수준이다. 아아, 이러다가는 뇌의 긴장감을 풀어주다 못해 대뇌 주름마저 다 펴질 것 같다.
불평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나는 영화를 꽤 즐겼다. 보면 볼수록 이야기는 공중으로 해체되고, 감각 인상만 남는다. 감동적이거나 격렬한 감정이 힘들어진 현대인을 위한 저염식, 저칼로리 영화 같다.
친구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사서는 아는 길을 일부러 멀리 돌아서 걸었다. 보도블록 개수를 하나하나 헤아려보았다. 벤치에 앉아, 모빌처럼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의 움직임을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나는 좀 지쳐 있었던 것일까. 피로를 푸는데도 기술이 필요한 것인가. 한숨 푹 자고 난 것처럼 머리가 개운해졌다. 잘 쉬었다.
김은하 | 칼럼니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