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송어축제에 참가한 가족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한겨레
한국 사람들은 정말 노래를 좋아합니다. 심지어 남의 나라 노래도 잘 알지요. 독일 대학에서 어학 과정을 밟을 때입니다. 라인강을 따라 뱃놀이를 간 적이 있어요. 로렐라이 언덕을 지날 때쯤 배에서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독일 민요 ‘로렐라이’가 나오기에 한국말 가사로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습니다. 주변에 있던 독일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깜짝 놀랍니다.
어느 날은 수업 시간에 독일어 선생님이 유학생들에게 각자 아는 독일 노래를 불러보자고 했습니다. 대부분 독일 노래를 모르더군요. 일본 친구는 영어로 ‘작은 평화’를 불렀습니다. 저도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한 곡 뽑았습니다. 우리말로요.
“거울 같은 강물 위에 숭어가 뛰노네/ 살보다 더 빠르게 헤엄쳐 뛰노네/ 나그네 길 멈추고 언덕에 앉아서/ 거울 같은 강물 위에 숭어를 보네.”
송창식과 윤형주가 듀엣으로 부른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제목은 ‘숭어’. 슈베르트가 작곡했지요. 그런데 친구들은 물론이고 독일어 교사도 이 노래를 모르는 거예요. 가사 내용과 제목을 묻더군요. 숭어가 독일말로 뭔지 제가 알 턱이 없잖아요. 한독사전을 찾아서 라베(Labbe)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독일어 교사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라베는 바닷물고기라고 우기더군요. 하지만 친구들은 내 말을 믿었습니다. 작곡가가 슈베르트라는 걸 알고 있고, 비록 한국어지만 가사까지 외워서 노래를 부른 사람은 바로 저니까 말이죠.
▶송어│게티이미지뱅크
슈베르트 ‘숭어’, 정작 독일인은 모른 까닭
귀국 후 통영에서 놀라운 장면을 봤습니다. 해안가로 수천 마리의 물고기 떼가 물을 튀기면서 화살보다 더 빠르게 헤엄치더군요. 그냥 뛰노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무지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움직입니다. 나그네인 저는 길을 멈추고 그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사람들은 갈고리로 물고기를 퍼 올리더군요. 물고기의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숭어라고 합니다. 아뿔싸! 정말로 숭어는 바닷물고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송창식과 윤형주가 부른 숭어는 뭘까요? 2007년에 신문에서 교육과학기술부가 음악 교과서에 실린 ‘숭어’를 ‘송어’로 고치기로 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실제로 모든 음악 교과서에서 ‘송어’로 고친 때는 2011년입니다). 숭어가 아니라 송어였던 겁니다. 알고 봤더니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평생 오스트리아에서 살다가 오스트리아에서 죽었습니다. 아마 그는 숭어를 본 적도 없을 겁니다. 독일어로 송어는 포렐레(Forelle)입니다.
저는 유학 가기 전에 강원도 깊은 산골 양어장에서 송어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략 열 명이 가서 송어 한 마리를 주문했더니 주인아저씨가 어이없어하면서 두 마리를 잡아주시더군요. 우리는 저마다 한마디씩 했는데 다들 연어와 비슷하다는 거였어요. 아마 그때까지 우리 가운데 연어를 먹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송어 살이 특이하게도 새빨간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TV에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회유하는 연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많이 봤거든요.
음, 왠지 송어와 연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제가 송어를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처음 먹어본 데는 이유가 있더군요. 차갑고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물고기라 그렇습니다. 원래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내려가 살다 어미가 되어 다시 강으로 돌아와 산란하는 물고기였습니다.
송어도 연어과에 속하죠. 연어는 먼바다로 나가는 데 반해 송어는 연해에서만 머물다 돌아온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송어는 어느 때부터인가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물길이 막히기도 했거니와 올라와서 살 만한 깨끗한 강물이 적어진 것이죠.
화천에는 없는 산천어의 기구한 운명
그러면 제가 강원도 산속에서 먹은 물고기는 정말 송어일까요? 송어는 한자로 松魚라고 합니다. 소나무 물고기라니…. 소나무 마디 색깔이라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납득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양식하는 송어는 대부분 무지개송어입니다. 196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수입한 어종이죠. 아마 제가 먹었던 송어도 무지개송어일 것입니다. 정말로 무늬가 소나무 마디 색깔과는 거리가 멉니다.
산천어(山川魚)도 연어과에 속하는 물고기입니다. 산천어는 바다에는 나가지 않고 민물에서만 삽니다. 산천어는 우리나라 토종 물고기인 송어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수입종인 무지개송어에 가까울까요? 학명을 보면 됩니다.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사 먹는 연어의 학명은 온코린쿠스 게타(Oncorhynchus keta)이고, 우리나라의 송어는 온코린쿠스 마소우(O. masou)입니다.
그런데 무지개송어는 온코린쿠스 미키스(O. mykiss)예요. 대문자로 시작하는 속명은 같지만 소문자로 시작하는 종명은 다르죠. 그러니까 연어, 송어, 무지개송어는 서로 엄연히 다른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산천어의 학명은 온코린쿠스 마소우 마소우(O. masou masou)입니다. 우리나라 송어의 아종이라는 뜻이죠.
쉽게 구분하자면 먼바다로 내려가 살다가 알을 낳으러 올라오는 물고기는 연어,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알을 낳으러 올라오는 물고기는 송어, 바다로 내려가지 못하고 육상에서만 살게 된 물고기는 산천어인 것입니다. 바다로 내려가는 송어는 50cm까지 자라지만 민물에 남은 산천어는 기껏 자라야 25cm입니다. 몸통의 무늬도 어린 송어의 모습입니다. 운명이 기구한 물고기죠.
산천어가 유명해진 까닭은 2003년에 시작된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 축제’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강원도 화천에는 산천어나 송어는 살지 않습니다. 화천에서 바다로 가려면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화천군은 산천어를 주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역 축제를 만들었습니다. 올해도 대성공이라고 하더군요. 산천어 축제를 탄생시킨 화천군의 공무원들은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산천어 때문에 생긴 화천의 명성이 산천어 때문에 더럽혀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산천어 축제를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없는 산천어를 가지고도 축제를 만든 화천군입니다. 있는 산천을 활용한다면 더 멋진 축제가 탄생할 수 있겠지요. 내년부터는 화천에서 전혀 다른 겨울 축제가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화천군민과 공무원 여러분 파이팅!
이정모_ 필자 이정모는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 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 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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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