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올해 시정연설은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결과가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취임 당시 국민에게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우리 사회는 발전된 나라들 중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심하고, 불평등은 다시 불공정을 구조화하고, 불공정은 사회 통합을 해치고, 급기야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필자는 오히려 우리 사회는 불공정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불평등이 다시 불공정을 심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이룩한 경제 발전은 온 국민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던 반면, 성장의 성과는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은 이른바 ‘이익은 사유화, 손실은 사회화’하는 불공정 시스템에 기초한 것이었다. 성장과 더불어 불공정과 부패가 공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경제적 불평등의 격차를 줄이고, 더 공정하고 통합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고, 우리 경제와 사회를 함께 잘 사는 경제와 사회구조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에 반대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 단 한 명도 차별받지 않고 함께 잘 사는 나라인 ‘포용국가’를 구체적 목표로 제시했고, 내년도 예산안은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규정했다.
사실 국민은 문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매년 예산안에서 보여주는 몇 천 억, 몇 십 조 하는 숫자만으로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와닿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이 시행될 때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4인 가족을 가정해 실제 혜택을 설명했다. 즉 열심히 일하는 30대 여성과 남성이 만나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를 모시며 출산을 앞둔 부부의 경우 (고용보험 가입되지 않은 비정규직, 자영업자, 특수고용직 산모에까지 확대한) 출산급여로 월 50만 원, 아이를 출산할 경우 아동수당으로 월 10만 원, 65세가 된 어머니는 기초연금으로 최대 월 25만 원, 가정 양육수당으로 최대 월 20만 원, 여기에 산업단지에 근무하는 (34세 이하) 청년재직자에게 지원되는 교통비 월 5만 원 등을 합하면 최대 월 110만 원의 추가 수입이 발생한다. 그 밖에도 아빠 유급출산휴가를 3일에서 10일로 늘리고, 두 번째 육아휴직 부모는 3개월간 상한액을 월 250만 원까지 상향 조정하고, 신혼부부 임대주택 등에 최저 1.2%의 저금리 대출을 지원하고, 공공임대주택 10년 후 분양 전환 자격을 부여한다.
포용국가로 가는 첫걸음
이러한 지원들로 결혼에서 출산까지, 평범한 신혼부부 가족의 어깨가 어느 정도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들로 결혼율과 출생률을 높이기에는 역부족이다. 문재인정부도 저출산 정책보다는 여성의 ‘일과 가정 양립’을 돕는 정책으로 방향을 수정했지만 여전히 중소기업·사기업·남성 등은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데 현실적으로 많은 장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초연금을 증액시켰지만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러한 문제를 문재인정부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도 ‘첫걸음’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지원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성장과 일자리 대책이다. 성장 엔진이 꺼지지 않아야 포용국가에 필요한 재원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공급된다면 정부의 재정 지원도 필요 없거나 최소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일자리를 통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힌 배경이다. 그런데 현재 고용시장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없어지는 일자리 속도가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 속도보다 빠르고, 65세 이상 고령층의 일자리가 증가하고 있지만 40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중산층 가계 중 상당수가 저소득층으로 전락하고 있고, 저소득층은 빈민화가 진행되고 있는 배경이다.
문제는 고용과 가계소득의 악화가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박근혜정부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제조업의 위기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조업 중에서도 자동차-조선-반도체 3대 주력 산업 중 일자리 창출 기여도가 높은 조선과 자동차가 무너지고 있다. 주력 산업인 제조업의 침체가 계속되면서 고용의 어려움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문 대통령이 진단한 배경이다. 이러한 진단은 늦은 감이 있지만 정확한 진단이다. 사실 필자는 문재인정부의 경제팀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제조업의 위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올해 고용 상황이 나빠지면서 뒤늦게 제조업의 위기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제조업의 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었음에도 지난해까지 제조업 위기에 대한 공식적인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용 상황은 둑이 무너져 물이 범람하면서 마을이 물에 잠겨 많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정부는 일차적으로 물에 잠겨 목숨을 잃을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야 하고, 또한 집이 물에 잠겨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즉 제조업이 위기에 처하면서 가장 약한 고리인 3, 4 협력업체에 고용된 임시직, 일용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그 결과 해당 지역의 자영업이 타격을 받고, 상가 수요가 줄어들면서 건물 경비나 청소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의 일자리가 줄고, 지역 부동산 및 부동산 관련 종사자 등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최근 경험하는 저소득층과 중산층, 40대 등의 일자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취약한 가계의 소득을 높이고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한 예산을 대폭 늘릴 수밖에 없다고 한 이유다. 눈에 띄는 것은 일하는 저소득가구에게 지원하는 근로장려금(EITC) 예산을 올해 1조 2000억 원에서 3조 8000억 원으로 3배 이상 확대했다는 것이다. 저임금 근로자를 위해 최저임금을 인상할 경우 그들을 고용하는 소상공인들의 부담이 증가하고, 저임금 근로자에 대해 정부가 일부 지원함으로써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또한 기초생활수급자 지원 예산도 올해보다 1조 7000억 원 증액했다. 기초연금과 장애인연금은 당초 인상 계획을 앞당겨 소득 하위 20% 어르신 150만 명과 생계·의료급여 수급대상 장애인 16만 명에게는 바로 내년 4월부터 월 30만 원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 한부모가족의 아동양육비도 월 13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인상했을 뿐 아니라 지원대상도 만 14세에서 만 18세 미만까지로 늘렸고, 만 24세 이하 청소년을 자녀로 두고 있는 한부모에게 지원되는 아동양육비도 18만 원에서 35만 원으로 늘렸다. 보육원에서 퇴소하는 보호 종료 아동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퇴소 2년 미만 아동에게 지자체의 지원과 별도로 월 30만 원의 자립수당을 추가 지원한다. 이 밖에 영세 소상공인과 영세 자영업 등에 대한 지원도 확대했다.
물론 저소득층 가계 및 저임금 근로자 등에 대한 소득 지원이나 사회안전망 강화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게다가 세계 경제가 후퇴 국면으로 진입하면서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무너진 둑을 재건해 물의 범람을 근본적으로 중단시켜야 할 것이다. 이는 산업 구조조정 또는 산업생태계의 재구성과 관련 있다. 산업 구조조정은 기존 산업 중 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는 산업구조의 업그레이드와 부가가치가 높고 노동집약적인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산업체계의 다양화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부가가치가 낮은 부문에 종사하는 저임금 근로자를 부가가치가 높은 부문으로 재배치하고,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러한 산업 구조조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조업 위기가 확산되며 정부가 지원해야 하는 대상이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소득층 및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소득 지원이나 사회안전망 강화는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필자는 문 대통령이 가계소득을 높이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예산에 대한 언급보다 혁신성장에 대한 예산 설명을 앞에 배치한 이유도 산업 구조조정과 산업생태계 재구성이 근본 대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해석해본다. 결국 시정연설에서 제시한 포용국가의 건설은 혁신성장의 성패가 좌우할 것이다. 문 대통령도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기에 기대를 해본다.
최배근│건국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