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실제(實際)로 있는 것인가 실재(實在)하는 것인가?”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을 본 관객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버닝’은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확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없다. 감독의 말마따나 ‘미스터리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관객의 평도 ‘모호하다’, ‘난해하다’는 말이 대부분이다.
ⓒCGV아트하우스
이창동 감독은 영화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질문과는 다르다. 익숙하지 않은 화법으로 대답하기도 힘든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감독은 ‘버닝’으로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보이지않지만 존재하는 것과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없는 것인데 있고, 있는 것인데 없는 것처럼 관객이 이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왜 해미가 사라졌고 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하는 관객에게 ‘사실은 이렇습니다’ 하는 확답이 아닌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표가 돌아왔다.
‘버닝’은 분노를 말하는 영화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이 젊은 세대였던 시절에는 정치적 문제든 계급에 관한 문제든 세상에 답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는 좀 다르다. 세상에 분명 잘못된 것이 있는데 그 문제가 정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구와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창동 감독은 여기서 청년의 분노가 시작됐다고 봤다.
그래서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답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서사를 바탕으로 영화를 소화하면 된다. 서사에는 저마다 추구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영화 내용에 빗대어 말하자면 벤이 해미를 죽였을 거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종수는 벤을 의심한다. 종수는 자신의 서사대로 생각할 뿐이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를 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가 만든 영화처럼 미스터리하다. 체질적으로 누군가의 앞에 나서는 일을 어색하고 부담스러워한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 내내 “감독과 작가는 영화로 말해야지 설명하려 들면 안 되는데” 하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관객이 느끼길 바라며 만든 영화지만 인터뷰를 하니 설명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것이다.
“감독은 작품으로 말한다”… 6편 중 5편 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버닝’은 작가 지망생이자 유통회사 알바생인 ‘종수(유아인)’, 종수의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세 사람에게 일어난 미스터리한 일을 담았다. 영화 제작이 결정된 후 곧이어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제71회 칸영화제 집행위원회가 ‘버닝’을 경쟁부문에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버닝’이 칸영화제에 초청을 받으면서 이창동 감독은 연출작 여섯 편 중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 다섯 편이 칸영화제에 소개되는 전대미문의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이후 ‘버닝’의 소식은 칸영화제를 빼놓고 말하기 힘들어졌다. 마치 영화제를 위한 영화인 것 같은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이 감독 역시 여기에 아쉬움을 표했다.
▶ 지난 5월 8일 개막한 칸영화제에 참석한 영화 ‘버닝’ 팀(왼쪽부터 이창동 감독, 배우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연) ⓒCGV아트하우스
“이상하게 ‘버닝’은 개봉 전부터 수상 여부에 마케팅을 올인한 것 같았어요.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칸에서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져서인지 오히려 관객의 실망감이 컸던 모양이에요. 영화를 만든 감독의 입장에선 미안한 일이죠. 만약 ‘버닝’이 칸에서 본상 수상을 했다면 한국 영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국내에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었지만 해외에서는 호평이 이어졌다.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데일리>는 ‘버닝’에 역대 최고 평점을 매겼다. 칸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는 “훌륭하며 강한 영화”라며 “순수한 미장센으로 영화의 역할을 다하며 관객의 지적 능력을 기대하는 시적이고 미스터리한 영화”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창동 감독은 이미 여러 번 칸영화제를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수상하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뒀다.
칸에 오는 작품들 대부분은 예술영화까지는 아니어도 개성이 강한 영화들이다. 개성이 강하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보는 이의 호불호가 나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도 그럴 줄 알았지만 의외의 호평이 이어져 의아했다고 했다. 대놓고 황금종려상을 언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칸에서는 너무 평가가 좋은 작품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특성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내심 불안했다. 비록 영화는 본상 부문에서 무관에 그쳤지만 영화평론가와 전문기자들이 선정하는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최고기술상인 벌킨상을 수상했다.
감독 개인으로서는 초청 자체로도 만족할 만하지 않았을까.
“칸의 레드카펫은 영화인의 꿈이라고 할 수 있죠. 모두가 그 레드카펫을 밟길 갈망하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레드카펫과 맞지 않는 사람이에요. 마치 몸치가 춤을 추는 것처럼 걸어가면서 미소를 짓는 게 참 불편해요. 게다가 ‘버닝’은 종수의 이야기잖아요. 영화 첫 공개를 칸의 레드카펫을 밟으면서 했는데 레드카펫은 벤의 화려한 색과 닮았어요. 참 아이러니한 순간이었죠.”
오랜만에 방문한 칸에 대한 소감을 털어놓던 감독에게 함께 작업한 배우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호흡은 어땠는지 물었다.
“유아인은 촬영장에서 제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을 잘 받아들여줬어요. 극중 종수는 사실 감정이든 뭐든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예요. 배우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죠. 직업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종수라는 인물은 연기하기 힘든 캐릭터예요.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기 힘든 역인데도 아주 잘해줬어요. 스티븐 연이 연기했던 벤은 모호함의 대상이자 미스터리 그 자체예요.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몸으로 표현하기는 힘든 인물이죠. 스티븐 연은 처음부터 잘해서 놀랐어요. 타지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았던 경험, 힘들게 배우생활을 하다가 성공을 거둔 경험 때문인지 잘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벤의 뭔지 모를 미묘한 느낌은 스티븐 연이 아니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누군가는 새롭고 낯선 것을 계속 시도해야죠”
▶ 영화 ‘버닝’ 스틸컷 ⓒCGV아트하우스
‘버닝’은 파격적이고 강렬한 엔딩 신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벌거벗은 남자가 어딘가로 떠나는 모습은 감독이 어떤 의도로 연출한 장면인지 궁금했다.
“그 장면에 의도가 숨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었으니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던져놓고 관객이 영화적으로 느끼기를, 이미지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길 바랐어요. 벌거벗은 남자는 세상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요. 그의 표정이 두려워하거나 수줍어하는 복잡한 감정, 그게 어떤 감정인지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버닝’은 분노에 대한 이야기지만 세상과 미스터리에 대한 무력감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던져놓고 싶었죠. 한편으로는 종수의 소설 이야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도 여자 친구도 없어진 상태에서 앞으로 종수가 어떤 소설을 쓸지, 그 소설은 어떤 의미를 줄지 관객에게 묻고 싶었어요.”
앞서 말한 대로 ‘버닝’을 본 관객의 평은 극명하다. 감독 본인도 호불호가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영화가 대중에게 익숙한 영화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관객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그대로 질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점은 의외였다. 이번 영화로 이창동 감독은 관객의 반응이라는 새로운 숙제를 떠안은 셈이다.
‘버닝’은 개봉하자마자 시련을 맞았다. 영화가 개봉한 5월 17일 당시 박스오피스를 주름잡고 있는 영화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 ‘데드풀 2’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다. 대진 운이 이렇게 없을까 싶을 정도다. 거기다 어려운 영화라는 낙인이 찍히다 보니 흥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감독은 이미 ‘버닝’이 흥행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예견했다.
“‘버닝’ 전에 개봉했던 영화도 항상 어려운 승부를 해야 했어요. 저는 항상 상업영화를 만들었고 상업영화로 마케팅을 해왔어요. 이번 영화도 상업영화예요. 당연히 흥행이 힘들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영화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거쳐서 만들어져요. 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힘들지만 그럼에도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려서 제작하게 됐어요. 사실 영화의 흥행은 마케팅할 당시 분위기에 따라 반응이 많이 달라져요. ‘버닝’이 대중에게 쉬운 영화는 아니지만 대중적인 접점을 찾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영화 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관객을 위해서도 누군가는 새롭고 낯선 것을 계속 시도해야 해요.”
앞으로도 이창동 감독은 새롭고 낯선 시도를 꾸준히 할 것이다.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버닝’을 준비하는 8년간 남들이 보기에는 쉬는 것 같았겠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아직도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곧 차기작을 준비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하겠다는 의욕을 되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귀띔했다. 우선은 관객이 던진 숙제에 답을 내는 것이 먼저다. 영화로 관객에게 질문하는 감독은 이제 관객의 숙제에 성실하게 답을 내놓을 준비를 시작하려 한다.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