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가 작품을 통해 ‘자유정신’을 추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런데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거부의 핵심 이유는 ‘자유정신’이었다.
사르트르는 수상 거부 이유를 밝히며, “인간은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분명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예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노벨상을 주는 기관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강연 요청을 받았다고 하자. 수상자는 즉석에서 요청 수락을 하지 않는다. 기관이 나서서 강연료 등 제반 조건을 협상한 후 강연 요청의 수락 여부를 결정한다. 매니지먼트 회사가 연예인을 관리하듯, 기관은 노벨상 수상자를 관리한다.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밝힌 이유 속에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한다. 실존이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찾고자 한다.
1945년 10월 29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클럽 망트낭에서 강연이 개최됐다. 강의 제목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사람들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의 참상에 몸서리쳤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불안해했다. 그래서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은 당시 가장 관심을 끄는 주제였다.
강연을 맡은 사람은 사르트르였다. 그의 경력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군 생활을 하던 중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극적으로 풀려난 적이 있었다. 또한 독일의 나치 정권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분연히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다.
강연 제목과 강연자 모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청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르트르는 청중 사이를 비집고 연단에 올라야 했다. 연단까지 가는 데 무려 15분이나 걸렸다. 청중은 왜소한 체격의 철학자가 전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했다. 실존주의의 제1 원칙이다. 그는 칼을 예로 들어 그 원칙을 설명했다. 우리 눈앞에 종이를 자르는 칼과 고기를 써는 칼이 있다. 두 칼의 용도와 제작법은 다르다. 눈앞의 두 칼이 실존이고, 칼의 용도와 제작법이 본질이다.
지금 칼을 쓰려는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칼인가 칼의 용도와 제작법인가. 당연히 칼이 더 중요하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숨 쉬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중요하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따지는 일은 그다음의 일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이 있고 나서야 인간의 본질을 논할 수 있다. 인간이 있기 이전에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을 따지려 하기보다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주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짐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절망해 좌절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르트르는 불안과 공포를 구분한다. 한밤중에 으슥한 골목길을 홀로 걸어갈 때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즉, 공포는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감정이다. 그러나 불안은 다르다. 길을 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났지만 바쁜 일이 있어 그냥 지나쳤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행위였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은 불이익도 없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목격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이것이 불안이다. 즉, 불안이란 자신이 한 행위를 두고 생겨나는 감정이다.
절망은 어떠한가. 사르트르는 절망이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를 희망해야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대회 때마다 꼴찌를 하는 선수를 생각해보자. 그는 대회가 열리면 출전해 열심히 달린다. 1등을 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체념하거나 포기하면 절망 상태가 된다.
결국 사르트르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촉구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두고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한다면 절망 상태가 된다.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결론이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와 아울러 삶의 방향 또한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에리히 프롬(1900~1980)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프롬은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으로 망명한 철학자다. 그는 “20세기의 문제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라며 인간성 상실을 비판했다.
그러면 상실된 인간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프롬은 인간의 실존 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나눈다. 소유적 실존이란 모든 것을 나의 소유로 만들려는 삶을 말한다. 반면 존재적 실존이란 모든 것과 참다운 관계를 맺으려는 삶을 말한다. 프롬은 소유적 실존을 존재적 실존으로 전환하라고 촉구했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은 물건이나 상품이 아니다. 따라서 소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소유적 실존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 즉 연인을 소유함으로써 사랑을 소유하려 한다. 연인을 가리켜 “넌 내 꺼!”라고 말한다. 연인을 소유해 지배하고 구속하려는 인식이 숨어 있다. ‘데이트 폭력’의 발생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낳은 무서운 결과이다.
존재적 실존의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참다운 관계를 맺고자 하기 때문에 사랑이 생산적인 활동이 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서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알고자 하고 배려하며 상대방에게 몰입한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에게 활력소가 되고, 그들의 만남은 생동감으로 넘쳐난다.
그런데 연애 시절 존재적 실존의 사랑을 하지만 결혼 이후 달라지기도 한다. 결혼은 서로의 육체, 감정, 관심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소유했다는 인식이 강화된다. 그 결과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끝난다. 존재적 실존의 사랑을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본래 소유는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소유의 대상을 확대해 사람까지 소유하려는 욕망이 만연해 있다. ‘내 선생님’, ‘내 직원’, ‘내 주치의’ 등등. 주변에서 일상화된 말들을 떠올려봐라. 소유적 실존의 사람들은 나의 것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자기 것을 지키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망 때문에 심지어 폭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주체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삶을 통해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만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의 소유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한 삶은 오히려 불안을 야기하고 절망감을 키울 수 있다. 더불어 사는 삶이 강조되는 이유다.
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